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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태형 시인 / 틀뢴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1. 10.

김태형 시인 / 틀뢴

 

 

세계는 틀뢴이 될 것이다

-보르헤스

 

 

십억 년쯤부터 한낮의 햇빛에 부글부글 거품이 되어 끓어오르듯이 뭔가 자꾸만 태어난다

 

끝까지 왔다고 생각하니 끝이 아니었다

 

녹조류들이 머릿속에 떠다닌다

 

숨이 거칠어지고 무릎이 구부러지면서 엉덩이가 생겨났다

 

해가 떠오를수록 언덕에 붉은 먼지가 가득 쌓였다

 

잎사귀는 잎사귀 뒤에서 자라나고 그늘은 그늘을 먹어 치웠다

 

저녁은 구름 탓이 아니었지만 누군가 꿈을 꾸기 시작했다

 

함께 죽을 수만 있다면 멸종은 아름답다

 

새가 공중으로 솟아오르는 것은 나무 한 그루 없기 때문이다

 

먼지구름이 내려와 쌓여 있는 저녁

 

아무것도 없는 비밀

 

굵은 가시뿐인 장미 넝쿨

 

발자국만 남은 화석

 

뭔가 안에서 뜨거운 것이 터져 나와 텅 빈 구멍이 만들어졌을지 모른다

 

그 자리에서 심장이 바닥 모를 심연으로부터 뛰기 시작했다

 

쥐들이 뭔가 갉아먹고 있었다

 

누구라도 죽일 수 있어 아름다운 이른 밤

 

 


 

 

김태형 시인 / 맹꽁이

 

 

전국 방방곡곡 여기 맛집. 저기 맛집

 

이 방송도 먹방 저 방송도 먹방

 

앞집 건강원에서도 뒷골목 영양탕 집에서도.

 

저마다 배를 풍선처럼 불리는구나

 

갯벌에 바다에 산에 개울에

 

수천수만 년 함께 살아온 무수한 생명을

 

그물 덫 올가미 함정에 채이고,

 

칩장하는 길짐승 날짐승 곤충까지 덮치니

 

어느 작은 숨이라도 살아남겠나

 

옛날 당 시인 한유

 

사람답게 살려거든 뱃속은 시서로 채워야 한댔는데

 

뒤뜰의 맹꽁아

 

너는 오늘 무엇으로 배속을 채웠더냐

 

칩장: “겨울잠을 자고 있는” 의 뜻.

 

 


 

김태형 시인

1971년 서울에서 출생. 1992년 《현대시세계》 가을호에 7편의 시가 당선되어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로큰롤 헤븐』 『히말라야시다는 저의 괴로움과 마주한다』 『고백이라는 장르』 『네 눈물은 신의 발등 위에 떨어질거야』. 시선집 『염소와 나와 그름의 문장』이 있음. 제4회 시와사상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