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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신미균 시인 / 저녁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1. 11.

신미균 시인 / 저녁

 

 

뱃가죽 홀쭉한

개 한 마리

빈 깡통뚜껑을 핥다가

 

조금씩 조금씩

깡통 속으로 고개를 들이민다

 

무슨 찌꺼기라도 붙었는지

바닥까지 주둥이를 넣어

정신없이 핥더니

 

이번에는

머리에 낀 깡통을

이리저리 흔들며

겅중겅중 뛰다가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다가

벽에 부딪히자

 

천지 분간을 못하고

제자리에서 뱅뱅 돈다

 

벗어버릴 수 없는

깡통 뒤집어쓴

개 한마리 저물어간다

 

 


 

 

신미균 시인 / 평면의 재구성

 

 

 토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복도는 뭘 할까? 아니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도 할일이 없다 복도가 되어 누워있는 사람이 있다 그는 길고 긴 복도 끝에서 끝까지 신나게 미끄럼을 탄다 그리고 나무와 나무를 이어붙인 마디를 밟으며 펄쩍펄쩍 뛰는 게임을 하다가 지치고 힘들어 누워버린 거다 누우니 도무지 할 일이 없나

보다 그는 자기 얼굴에 침 뱉는 놀이를 하다가 배가 고픈지 알루미늄 창틀과 자루달린 하늘을 줄줄 끌고 와 더듬더듬 먹을 것을 만든다

 

 이리저리 남의 교실만 기웃대다 쫓겨난 구름은 복도가 거기 누워 있는 것을 알기나 할까? 유리창과 문손잡이와 모서리의 거미줄을 바라만 보고 있다

 

 복도는 저 혼자 죽지 못한다

 혼자 목도 조르지 못하고

 혼자 면도칼도 잡지 못하고

 혼자 약도 못 먹는다

 밖에 나간 적이 없으니

 자동차에 치일 염려도 없다

 벼락에 맞을 수도 없다

 그러니 어쩔 수 없다

 

 앗, 아직도

 하수도에 물 흘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살아계셨다, 복도

 

 쉿, 조용히 해

 뛰다 또 혼날라

 

 


 

신미균 시인

1955년 서울에서 출생. 서울교육대학교 졸업. 1996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으로 『맨홀과 토마토케첩』(천년의시작, 2003)과 『웃는 나무』(서정시학, 2008), 『웃기는 짬뽕』(푸른사상,  2015), 『길다란 목을 가진 저녁』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