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균 시인 / 저녁
뱃가죽 홀쭉한 개 한 마리 빈 깡통뚜껑을 핥다가
조금씩 조금씩 깡통 속으로 고개를 들이민다
무슨 찌꺼기라도 붙었는지 바닥까지 주둥이를 넣어 정신없이 핥더니
이번에는 머리에 낀 깡통을 이리저리 흔들며 겅중겅중 뛰다가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다가 벽에 부딪히자
천지 분간을 못하고 제자리에서 뱅뱅 돈다
벗어버릴 수 없는 깡통 뒤집어쓴 개 한마리 저물어간다
신미균 시인 / 평면의 재구성
토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복도는 뭘 할까? 아니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도 할일이 없다 복도가 되어 누워있는 사람이 있다 그는 길고 긴 복도 끝에서 끝까지 신나게 미끄럼을 탄다 그리고 나무와 나무를 이어붙인 마디를 밟으며 펄쩍펄쩍 뛰는 게임을 하다가 지치고 힘들어 누워버린 거다 누우니 도무지 할 일이 없나 보다 그는 자기 얼굴에 침 뱉는 놀이를 하다가 배가 고픈지 알루미늄 창틀과 자루달린 하늘을 줄줄 끌고 와 더듬더듬 먹을 것을 만든다
이리저리 남의 교실만 기웃대다 쫓겨난 구름은 복도가 거기 누워 있는 것을 알기나 할까? 유리창과 문손잡이와 모서리의 거미줄을 바라만 보고 있다
복도는 저 혼자 죽지 못한다 혼자 목도 조르지 못하고 혼자 면도칼도 잡지 못하고 혼자 약도 못 먹는다 밖에 나간 적이 없으니 자동차에 치일 염려도 없다 벼락에 맞을 수도 없다 그러니 어쩔 수 없다
앗, 아직도 하수도에 물 흘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살아계셨다, 복도
쉿, 조용히 해 뛰다 또 혼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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