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길성 시인 / 바람이 분다
늙은 창문으로 세상을 본다 상처 없이 보내는 시간이 두렵다고 가시가 망막을 찢으며 어둠을 데려 온다 등 굽은 할머니가 다리 저는 할아버지를 부축하고 지나가는 저녁이다 눈꼽처럼 별이 뜨고 개 짖는 저녁이 절룩이며 깊어간다
나는 어릴 때 새들이 배가고파 우는 줄 알았어 지나가는 저 이쁜 아가씨에게 우표를 붙여주면 내게로 올까
친구는 공사장에 삽을 꽂으며 웃었다 그 친구는 죽어서도 주소가 없다 내 주소는 어디쯤에서 우편물을 기다리고 있을까
오래전 골목으로부터 벚꽃 불어오는 밤이다
붉은 피가 검어지고 그 피가 푸르게 번쩍이는 밤이다 외투에 묻어 들어 온 찬바람이 아직 방안에 가득한데
삽자루에 꽃 핀다
우리는 삶을 마감한 뒤에 빛으로 돌아갈 것인가 어둠으로 돌아갈 것인가
세상 모든 창문들은 질문으로 빛나는데 마차는 하늘 위에 있고 말들은 준비가 덜 되었다
조길성 시인 / 아직도 아궁이 불빛이
한겨울 문고리 함부로 못 만지는 마음이 쩍쩍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방문을 열면
손톱으로 이를 잡아 터뜨리는 오도독 오도독 소리에 놀란 싸라기눈이 슬레이트 지붕 위를 벼룩처럼 뛰는 밤
아궁이 불빛이 괄게 타오르면 가마솥 끓는 소리가 기관총 소리를 닮았다고 개들이 사람고기를 뜯어 먹고는 철버덕철버덕 고인 물을 양껏 먹는 걸 보니 사람고기가 짜기는 짠 모양이라고 이미 기차에 몸을 싣고 청천강 쯤 건너고 있는 눈빛으로 할머니 한 분 중얼거리며 앉아 있고 고양이와 강아지가 한 마리씩 그 곁에 서로 모르는 척 앉아있고 기차가 잠시 머문 봉천이나 장춘쯤에서 봄으로 가는 문고리를 만지작거리는 나이 오십을 바라보는 사내가 아궁이 불빛을 들여다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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