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향옥 시인 / 말발굽 소리
갈기를 날리는 김씨는 도배사 손가락 하나 톡 튕겨 꽃잎이 벙그러지는 벽지를 고른다 오렌지 잔이 엎어지면 노을이 되고 노을빛 하늘거리는 금붕어꼬리 그녀의 원피스자락이 되는 벽지를 고른다 벽지 본향은 초원이다 풀물 드는 풀밭에 앉아 오늘도 편자를 간다 역마살 낀 빗자루 쓱쓱 문지르면 마을이 생겨나고 강물이 생겨나고 길이 생겨난다 먼지 뽀얀 광야를 내달리고픈 김씨는 벽지 도배사 숨 턱턱 막히도록 달리는 길은 언제나 벽 좁고 긴 걸상 위로 잽싸게 굴러 일어서는 똑딱 칼잡이의 삶 똑딱, 칼끝을 분지르고 단숨에 손가락 사이로 벽과 벽 하늘과 하늘 경계를 긋고 벽에 귀를 대면 들리는 소리 따그닥 따그닥 따그닥 따그닥 따그닥 따그닥......
조향옥 시인 / 층층층
대평에 출토한 청동기문화는 없다
인류가 최초 합금문자로 발전시킨 흔적은 구리의 색과 깨지기 쉬운 청소년기의 단단함을 알맞은 비율로 형을 뜨고 날을 갈아 무우밭 아래로 층을 내는 것이었다
7층 현대밭 경작층 6층 홍수범람 모래 퇴적층 5층 삼국시대 아이스크림 층 4층 홍수범람 후 종이컵 층 3층 청동기 동영상 강의 층 2층 청동기 만화 층 1층 기반퇴적 개미집 찌그러지는 깡통 층
주석17%의 검을 빼들고 문자를 날린다 (짜아식,몇 층이야! 빨리 안 내려오고!)
불법을 자행하는 반칙의 나라에는 땅 위에 묘석을 깐 입술 튼 붉은 항아리가 있었고 돌 그물추에 맞아 졸도하던 물고기가 있었고 숫돌에 돌칼을 쓱쓱 갈아 나비를 잡던 사나이가 있었다
*진주 청동기 고인돌 층에는 사냥돌 하나 날려 새를 잡았다는 문자메시지 난다 (안돼! 지금 엄마랑 무우 뽑는 중이야!)
*경남 진주 청동기문화박물관
조향옥 시인 / 종소리
알람이 울었다
백김치가 좋아? 총각김치가 좋아? 난, 노틀담 곱추가 좋아 난, 용돈이 좋아 역시 집시처녀를 사랑하는군 그 세계는 고소해 손가락으로 슬쩍 찍어 쪽 빨아 봐 햐~ 뼈까지 녹아야 제 맛인 걸 그게 원래 종소리야 귀를 틀어막아도 구석구석 울려 퍼지는 고소한 젓갈의 세계야
백김치가 좋아? 총각김치가 좋아? 난, 집시처녀가 좋아 흠, 역시 꼬리하군 집시처녀 치마폭에 척척 안기는 저 꼴 좀 봐 어쭈~통 속에 서로 안고 척 눕네 귀를 틀어막아도 구석구석 울려 퍼지는 우리집 종소리 싱거우면 종을 쳐, 더 세게 종을 쳐, 제발 치마폭을 찢지 마 그만, 집시가 잠들었어 콰지모도 곱추도 잠 들었어
쉿, 조용~
조향옥 시인 / 나의 토크쇼
나는 지금 바나나 씨알이다 어머니는 새콤달콤한 열대과일이었고 전쟁 속에 길을 걸어 온 노래였다 할아버지는 원래 사냥꾼 숨어서 들소를 덮쳐야 제 맛이라고 자꾸 뛰라 재촉 하신다 암술과 수술이 만나 어머니는 돌고래를 낳고 나는 안테나를 언덕에 세운다 화면 속에서 걸어 나오시는 할아버지 호통치신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돌고래에 깔려 화석이 된다고 눈을 부라리신다 나는 다리를 까딱거리며 채널을 돌려 토크쇼를 본다 밤하늘 별을 가리키는 할아버지 나는 손가락이 짧아 핸드폰 안에 별이 있다고 말한다 들판에 킁킁 바람 냄새 맡는 할아버지 나는 전광판 화살표가 풍량계라고 말한다 어머니는 동생을 낳고 망고를 낳고 오렌지를 낳고 나는 바나나를 낳는다 계간《시와 경계》 2011년 등단시
조향옥 시인 / 드네프르
구름이 뭉텅뭉텅 올라와 나는 구름 속에 있고 뻐꾸기 울어 수국이 피어나고 수국 피어나는 계단 끝에 나는 있고
반짝하는 저것은 길인가 강인가
만지고 싶은 것들은 반짝하는 꽃 꽃은 만지지 말고 보기만 하라는지 뻐꾸기는 구름 속에서 울고 계단 옆 수국은 변색을 거듭하고 실금 같은 드네프르 반짝거림은 어둠 때문이 아니라 물고기 비늘 때문 어둠 속을 걸어 온 실금 같은 길 허공의 계단 끝에 나는 있고
뻐꾸기가 뭉텅뭉텅 울어 수국은 구름처럼 피어나고 구름 저편 산초 나뭇가지에 호랑나비 애벌레 두 마리 달라붙어 있는 중
-시집 『남강의 시간』(애지, 2021) 수록
조향옥 시인 / 티베트 나비
암도로촉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산맥을 넘을 때 그 순간 너는 그 자리에 날고 있었니?
자갈돌 한 개 모래 눈물 흘러내리는 티베트고원 희부연 강물 모래 산을 휘도는 그때 쿵쿵 뛰는 지구의 맥박 소리 채깍채깍 흐르는 땅속의 신음 심장에 바늘을 꽂고 날고 있는 나의 나비야 조캉사원 바닥에 온몸 내던지는 간절한 물음 무릎 가슴 이마로 맥박을 짚는 날갯짓 사원 기둥 뒤에서 흐느끼는 물소리 살아서 날고 있는 나의 나비야 그 순간 너는 그 자리에 있었니?
나비야 나의 나비야 까만 발등 날아서 넘어가다오 얄룽창포강 쌀보리 밭둑에 봄비 맞는 한 송이 민들레 앞에서 서성거리지 말아다오 벽에 붙은 동그란 소똥이 말라가는 날에 날아다오 나비야 너는 나의 숨소리로 날던 나비 수유차 한잔 얻어 마시고 넘어가다오 고원의 까만 발등을
나의 나비야
-시집 『남강의 시간』(애지, 2021)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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