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자 시인 / 귀 먼자(KIMEUNJA)
공항에서 잃어버린 두 개의 이민 가방이 도착한 것은 미국에 도착하고 육개월 후, 동네 간이 우체국 찌그러진 깡통 이민 가방이 내 발 앞에 놓여을 때 이름표에는 이름이 반쯤 지워져 있었다 사람들은 나를 KIMEUNJA 귀.먼.자.로 불렀다 운명같은 해독 이후 나는 귀머거리가 되었다 모국어가 목마른 날이면 먹먹해진 귀를 홀로 만지며 대숲을 뒹구는 사람들 틈 속에서 지퍼를 열면 붉은 울음이 빗방울처럼 매달려 있었다 이민 올 때 엄마가 사준 꽃무늬 원피스는 아직도 한쪽 팔이 꺾인 채 옷장 한켠 박제처럼 걸려 있다 귀머거리의 속성은 엷게 떨다 눈을 잠가 버리는 것 겨울에 떠나 여름에 도착한 개화를 모르는 그리움 깊숙이 손을 넣으면 이민 올 때 언니가 사준 벙어리 장갑이 딸려 나온다 귀가 멀면 입도 멀어지는 법 이국異國은 명치뼈 아래께 느껴지는 통증 같은 것 흰 편지에 봉인된 얼굴들을 넣고 돌아서는 색색色色의 사람들 발음 틀린 소통이 오래 아프다
김은자 시인 / 소리에 깃들다
아버지 묘지를 다녀 올 때마다 생각한다 사람 사는 일이 저렇듯 고요하다면 애달픈 일이 없겠다고 무덤의 비문이 문패라면 삶은 구천을 떠도는 것 묘화墓花 꽃잎 위로 매운바람이 울고 간다 아버지는 아직도 나를 위해 한쪽 발 지긋이 소리를 조율하고 계셨다 견디지 못하는 것은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들이다 생명은 무채색 보드라운 죽음 낯익은 아버지의 목소리가 나를 소리 속으로 밀어 넣으신다 장난감 모빌처럼 해지는 산을 내려온다 길가 유모차에 아기가 잠들어 있다 작은 귀가 대지의 소음을 삼킨 채 새근새근 잠들어 있다 섬뜩한 고요 소리에 깃든다는 것은 저렇듯 어두워지는 것 안과 밖이 만나 끝도 없이 적막해 지는 것이다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용임 시인 / 산책 외 1편 (0) | 2023.01.12 |
---|---|
이자규 시인 / 만개 외 1편 (0) | 2023.01.12 |
조향옥 시인 / 말발굽 소리 외 5편 (0) | 2023.01.12 |
손은주 시인 / 붉은점모시나비 외 6편 (0) | 2023.01.12 |
조길성 시인 / 바람이 분다 외 1편 (0) | 2023.0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