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이용임 시인 / 산책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1. 12.

이용임 시인 / 산책

우리는 발자국을 얼음처럼 떨어뜨렸다

파고의 푸름 속에

일렁이며 저승 나비 무늬

무덤의 가장자리마다 핀다던

마른 꽃으로 굳었다

물이 핥고 가는 산호처럼

나의 시간을 빚어 실루엣을 만들었다

그림자를 볼 때마다

그대를 떠올렸다

뒤집으면 다시 시작되는

유리 속 황금시대

좋았던 날들만 무한재생하는

착각과 망각의 틈새마다

우리는 조약돌처럼 은닉했다

눈 감아라 뚝딱 꼬리를 늘이며

달아나는 술래, 손가락이 찾아 주길 기다리며

 

 


 

 

이용임 시인 / 아름다움은 조용히

​​

 나는 바다를 건너고 있어 달밤에, 잃어버린 말들을 만지고 있어 꽃잎을, 여자가 흘린 속삭임을 보고 있어 천 년 동안, 나비의 혈관으로 흩어진 하늘과 헤아릴 수 없는 귀들이 열린 파도 위를 맨발로, 걷고 있어 비밀을, 꿈의 심장을, 한밤에 고인 눈물을, 꿈은 닳고 있어 오래오래, 골목을 돌아 들판을 건너 절벽에 이르러 길들이 몸을 던질 때 이야기들이 빛나고 있어 바위 위에서, 물이 그림자를 던지고 있어 먼 곳으로, 나는 떠나고 있어 모든 내부가 환해지는 시간에, 투명한 뼈들을 향해 손을 내밀고 있어 궁륭을 떠받친 기둥들, 닿을 수 없는 이름을 부르며 한없이 가늘어지고 있어 손가락부터 발가락부터 속눈썹부터 차례로, 공기가 되고 있어 창문들이 하나 둘 닫히는 시간에 구름이, 얼굴을 놓고 가고 있어 나는 풍경이 되고 있어

 

 


 

이용임(李庸任) 시인

1976년 경남 마산에서 출생. 숙명여대 전산학과 및 동대학원 석사과정 졸업.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수료. 200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엘리펀트맨〉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안개주의보(문학과지성사, 2012)가 있음. 웹진 『시인광장』편집위원 역임. 현재 '21세기 전망'의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