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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은자 시인 / 귀 먼자(KIMEUNJA)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1. 12.

김은자 시인 / 귀 먼자(KIMEUNJA)

 

 

공항에서 잃어버린 두 개의 이민 가방이 도착한 것은

미국에 도착하고 육개월 후, 동네 간이 우체국

찌그러진 깡통 이민 가방이 내 발 앞에 놓여을 때

이름표에는 이름이 반쯤 지워져 있었다 사람들은 나를

KIMEUNJA 귀.먼.자.로 불렀다 운명같은 해독 이후 나는

귀머거리가 되었다 모국어가 목마른 날이면 먹먹해진

귀를 홀로 만지며 대숲을 뒹구는 사람들 틈 속에서

지퍼를 열면 붉은 울음이 빗방울처럼 매달려 있었다

이민 올 때 엄마가 사준 꽃무늬 원피스는 아직도

한쪽 팔이 꺾인 채 옷장 한켠 박제처럼 걸려 있다

귀머거리의 속성은 엷게 떨다 눈을 잠가 버리는 것

겨울에 떠나 여름에 도착한 개화를 모르는 그리움

깊숙이 손을 넣으면 이민 올 때 언니가 사준 벙어리

장갑이 딸려 나온다 귀가 멀면 입도 멀어지는 법

이국異國은 명치뼈 아래께 느껴지는 통증 같은 것

흰 편지에 봉인된 얼굴들을 넣고 돌아서는 색색色色의

사람들 발음 틀린 소통이 오래 아프다

 

 


 

 

김은자 시인 / 소리에 깃들다

 

 

아버지 묘지를 다녀 올 때마다 생각한다

사람 사는 일이 저렇듯 고요하다면

애달픈 일이 없겠다고

무덤의 비문이 문패라면

삶은 구천을 떠도는 것

묘화墓花 꽃잎 위로

매운바람이 울고 간다

아버지는 아직도 나를 위해

한쪽 발 지긋이

소리를 조율하고 계셨다

견디지 못하는 것은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들이다

생명은 무채색

보드라운 죽음

낯익은 아버지의 목소리가

나를 소리 속으로 밀어 넣으신다

장난감 모빌처럼

해지는 산을 내려온다

길가 유모차에 아기가 잠들어 있다

작은 귀가 대지의 소음을 삼킨 채

새근새근 잠들어 있다

섬뜩한 고요

소리에 깃든다는 것은

저렇듯 어두워지는 것

안과 밖이 만나

끝도 없이 적막해 지는 것이다

 

 


 

김은자 시인

서울에서 출생. 숙명여대 졸업. 1982년 도미, 현재 미국 뉴져지 주에 거주. 미주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과 월간 《시문학》신인우수 작품상 당선으로 등단. 영화진흥위원회 시나리오 공모 당선. 시집 『외발노루의 춤』 『붉은 작업실』이 있고 산문집으로 『슬픔은 발끝부터 물들어온다』가 있음. 제5회 재외동포문학상 시부문 대상, 미주동포문학상,  환태평양 영화제 최우수 시나리오상, 윤동주 문학상 해외동포 부문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