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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손은주 시인 / 붉은점모시나비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1. 12.

손은주 시인 / 붉은점모시나비

 

 

엄마는 주문을 외우며 배를 쓰다듬었죠

괜찮다, 괜찮다 그래도 괜찮다고,

 

물에 잠긴 달은 알까요

까닭 없이 따끔거리는 이유를,

 

열두시 초침의 눈에 가면 쓴 여자애가 보여요

 

고장 난 엄마의 시계가 숨을 돌리면 까칠한 모래의 악보가 펼쳐져요

sien의 슬픔이 바닥으로 쏟아져 유리구두의 그림자를 먹어치우죠

 

겹겹의 생각이 스며들면 창백한 입술이 탈출을 시도해요

쌓인 약 봉투가 고장 난 심장의 맥이 되어 줄 거라 애써 위로를 해요

 

그런 날엔

허기진 달의 복수가 차올라 선홍빛 꽃무릇 한 다발 안고 며칠을 울었어요

웅크린 자궁이 부어오르고 생리가 자랐거든요

 

어린 무희의 춤이 바늘 끝에서 흩날리다가안단테 바람을 먹은 붉은점모시나비가 되는 거죠

 

고열에 시달린 어깻죽지 너머 스무 살이 날개를 접었다 펴요

몸부림은 단단해진 여자의 잎일 거예요

뒤쪽의 상처는 젖은 나비의 옷을 말리고 사라져요

 

교차된 그림자 낮12시를 지나가면 가벼워진 빛이 반대 방향에서 걸어와요

 

 


 

 

손은주 시인 / 망고스틴소녀가 사생아를 낳았어요

 

 

돌아올 거란 거짓말 망고스틴 나무속으로 파고들어요

 

꽃받침 조각의 숨바꼭질 그 아이 탯줄을 휘감으면부풀어 오르는 자궁,물의 살갗도 돌아누워요

 

그때쯤이었던 것 같아요 필리핀 남부

소녀가 검은 눈동자 사생아를 낳았다고,

 

두껍고 단단한 씨를 삼켰나요 소화불량 소문이 커져 가요

하얀 거짓말 안고 뒤척이는 그녀의 낮잠

 

약속은 일기예보의 빨간 눈동자를 닮았어요

재스민 향기 가득한 눈물 축축한 별이라 부르기로 해요

 

거울을 쳐다봐요 길 잃은 발가락 볼품없는 지문을 닦아 주죠

열아홉 소녀의 사생아

 

햇빛 먹으며 그래도 자랄 거예요

 

두 다리가 후들거려요 엉켜버린 머리카락 시간을 기어올라요

부풀다 가라앉은 코피노의 이파리

 

잠긴 꽃의 이야기를 망고스틴이라 불러요

 

아직도 생부는 신호대기 중, 그 코피노 파더를 아시나요

 

 


 

 

손은주 시인 / 훔쳐보기

 

 

 웅크렸다 폈다 벽을 타는 소리의 온도는0〬c, 밤의 이야기가 태엽스프링처럼 돌아가면 당신과 벽 사이 알몸의 하이힐 헐떡거린다.

 그녀의 등에서 튕겨 나온 팔과 다리가 잘린 채 날아가는 집세.

 애써 삼각형은 엇각을 읽는 중이다. 목의 세계가 대문 없는 집을 짓고 있다. 발 달린 물고기 직립보행을 하다 아가미 내밀면 바닥은 꿈 없는 그녀의 횡단보도가 된다.

 고층아파트 밑 절뚝거리며 늙어가는 하루살이 떼. 달동네 빈터에 뾰족한 이야기. 12센티 하이힐이 그녀의 새벽을 밟으면 조화 꽃이 흔들려 거짓말처럼 향기를 만든다. 별똥별 하나 손목의 경계에서 주름 긋다가 벗어나려 할 뿐이다.

 

 


 

 

손은주 시인 / 손바닥선인장

 

 

오목렌즈 속 웅크린 어둠이 웃었다

 

갉아먹을수록 틈에서 자라나는 습기

 

더 이상 바람의 냄새를 맡을 수 없는 그림자가 누워있고

 

섞은 줄기에서 나온 아이는 지느러미를 닮아 비린 맛이 났다

 

초록 잠을 지나는 것들은 짓무른 혀에서 뾰족한 이야기가 된다

 

엄마는 그게 삶이라고 꿈을 털어버린다

 

토막 난 말은 가시처럼 살아나 그들을 따갑게 한다

 

아빠의 주검에서 주저흔이, 아이의 손에선 방어의 흔적이,

 

주저흔도 방어흔도 없는 엄마의 몸엔

 

슬픔의 종자가 번식하고 있다

 

흔적은 마지막 문장의 쉼표 같은 것

 

바닥에 달라붙은 눈동자가 씨방을 불태우면

 

햇볕을 싫어한 소문이 매달린다

 

벽 속 문에 안치된 죽음은 허기진 마침표

 

천천히 훑고 간 렌즈 속에서 빠르게 자라는 광선무덤은 세개의 모서리, 바다는 은유의 잠이 된다

 

 


 

 

손은주 시인 / 붉은 크리스마스 섬

 

 

새끼손가락에 끼워진 파란 눈물이

북극 해류를 타고 날카롭게 변했나요

 

늑막 주머니에 포개진 입술 빨간 립스틱을 발라요

산란을 위해 죽음을 넘은 홍게들 바다로 오는 시간이죠

 

크리스마스 섬 링거를 달고 붉은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어요

일억 이천 마리의 홍게,종족을 이어가려는 생의 마지막 몸부림

 

떨어져 간 오른쪽 팔 또 하나의 섬이 되는 거죠

붉은 생채기 혹 돋아나는 날 아가미로 호흡을 해요

 

붉은 산호섬이 떠오르면 가파른 숨이 차올라요

육지는 바다에 휩쓸려 절벽 귀에 붙어버리죠

 

배를 문질러요 진통이 시작되면 섬은 다리를 모으죠

온 힘을 다해 말랑말랑 모래 속 알을 낳는 어미 홍게

새끼들 깨어날 때쯤, 먼 바다 그 너머 싱크홀에 갇혀버리겠죠

붉은 크리스마스 섬 자궁이 얇아지면 뭇별도 탈출을 시도해요

2022년 《시와 사람》 신인상 등단 시​

 

 


 

 

손은주 시인 / 산토리니 씨 위스키 한 잔 할까요?

 

 

부겐빌레아 꽃 지는 날,

정열은 죽었어요 그리스 에게해의 작은 섬에 갇혔죠

 

산토리니 씨 위스키 한 잔 할까요?

 

나의 사랑은 어디로 갔을까요

당신의 장례식장에선 울지 마세요

쪽빛 노을은 파도에서부터 시작되는 걸음마

 

하얀 수평선이 찰랑거려요

다시 돌아올 거란 말, 거짓말

위스키잔에 살짝 기댄 바람이 말해주더군요

 

사랑은 사탕이라 불러도 괜찮아요

이응을 빼면 사라가 되겠죠?

그렇다니까요 내 이름이잖아요

 

상큼한 오렌지 터트리며 우리 만나기로 해요

 

산토리니 씨 이아마을 색의 향연 보이나요,

지중해 물결은 영원히 죽지 않아요

나지막이 속삭이는 춤선

 

그러니까

내 안에 이별을 가둔 건 명백한 유기

이제 흩뿌려진 그 섬을 돌려드릴게요

 

아름다운 해변 선술집에서 만나요

산토리니 씨는 오늘부터 나와 사랑에 빠질 걸요

 

-시집 『애인을 공짜로 버리는 법』(시와 사람,2022) 수록​

 

 


 

 

손은주 시인 / 애인을 공짜로 버리는 법

 

 

  발렌티노 가방 속에서 웃고 있는 당신

 

 명품처럼 숨겨놓았다가 파파라치 컷에 들켜버린 날,

 장면들이 우루루 쏟아져요

 

 에스프레소 콘파냐를 나눠마셨죠

 

 파우더 슈가를 뿌린 달콤한 디저트에 타이트한 당신 한 방울 뿌려요

 

  리알토 다리 위에서 속삭이던 물의 입술 기억하나요

  베네치아 야경은 몽블랑 만년필에 담아 왔는데,

 

 아슬아슬한 우리의 문장 끝나가요

 

 기울어진 종탑에서 뛰어내리는 연습을 할까요

 베네치아 날씨를 닮았군요 변덕쟁이 당신

 

 어깨 너머 폭우가 어긋난 새벽 울음을 게워내요

 앞일까요, 옆일까요, 반쯤 당신 그려놓고 스케치하다 잠들겠죠

 

 내일은 불협화음 콘서트가 열린다죠 두 귀를 덮고 후렴구를 뱉어내겠죠

 

 아무도 모르게 흩날리는 당신을, 책갈피로 덮을까요, 꽂아둘까요

 

-시집 『애인을 공짜로 버리는 법』(시와 사람,2022) 수록

 

 


 

손은주 시인

경북 의성에서 출생. 대신대학교 종교교육학과 중퇴.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과 졸업. 2022년 《시와 사람》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애인을 공짜로 버리는 법』이 있음. 전국여성문학 시 부문 최우수상, 문열공 이조년 선생 추모 전국백일장 대상. 2020년 동서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