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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조길성 시인 / 바람이 분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1. 12.

조길성 시인 / 바람이 분다

 

 

늙은 창문으로 세상을 본다

상처 없이 보내는 시간이 두렵다고

가시가 망막을 찢으며 어둠을 데려 온다

등 굽은 할머니가 다리 저는 할아버지를 부축하고 지나가는 저녁이다

눈꼽처럼 별이 뜨고

개 짖는 저녁이 절룩이며 깊어간다

 

나는 어릴 때 새들이 배가고파 우는 줄 알았어

지나가는 저 이쁜 아가씨에게 우표를 붙여주면

내게로 올까

 

친구는 공사장에 삽을 꽂으며 웃었다

그 친구는 죽어서도 주소가 없다

내 주소는 어디쯤에서 우편물을 기다리고 있을까

 

오래전 골목으로부터 벚꽃 불어오는 밤이다

 

붉은 피가 검어지고

그 피가 푸르게 번쩍이는 밤이다

외투에 묻어 들어 온 찬바람이 아직 방안에 가득한데

 

삽자루에 꽃 핀다

 

우리는 삶을 마감한 뒤에 빛으로 돌아갈 것인가

어둠으로 돌아갈 것인가

 

세상 모든 창문들은 질문으로 빛나는데

마차는 하늘 위에 있고 말들은 준비가 덜 되었다

 

 


 

 

조길성 시인 / 아직도 아궁이 불빛이

 

 

한겨울

문고리 함부로 못 만지는 마음이

쩍쩍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방문을 열면

 

손톱으로 이를 잡아 터뜨리는 오도독 오도독 소리에 놀란

싸라기눈이 슬레이트 지붕 위를 벼룩처럼 뛰는 밤

 

아궁이 불빛이 괄게 타오르면

가마솥 끓는 소리가 기관총 소리를 닮았다고

개들이 사람고기를 뜯어 먹고는

철버덕철버덕 고인 물을 양껏 먹는 걸 보니

사람고기가 짜기는 짠 모양이라고

이미 기차에 몸을 싣고

청천강 쯤 건너고 있는 눈빛으로

할머니 한 분 중얼거리며 앉아 있고

고양이와 강아지가 한 마리씩 그 곁에 서로 모르는 척 앉아있고

기차가 잠시 머문

봉천이나 장춘쯤에서

봄으로 가는 문고리를 만지작거리는

나이 오십을 바라보는 사내가

아궁이 불빛을 들여다보고

 

 


 

조길성 시인

1961년 경기도 과천 출생. 2008년 《창작21》로 등단. 시집으로 『징검다리 건너』(문학의전당, 2011)와 『나는 보리밭으로 갈 것이다』(b, 2017)가 있음. 현재 한국작가회의, 창작21작가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