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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문성해 시인 / 한솥밥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1. 12.

문성해 시인 / 한솥밥

 

 

기껏 싸준 도시락을 남편은 가끔씩 산에다 놓아준다

산새들이 와서 먹고 너구리가 와서 먹는다는 도시락

 

애써 싸준 것을 아깝게 왜 버리냐

핀잔을 주다가

내가 차려준 밥상을 손톱만 한 위장 속에 그득 담고

하늘을 나는 새들을 생각한다

 

내가 몇 시간이고 불리고 익혀서 해준 밥이

날개 죽지 근육이 되고

새끼들 적실 너구리 젖이 된다는 생각이

밥물처럼 번지는 이 밤

 

은하수 물결이 잔잔히 고이는

어둠 아래

둥그런 등 맞대고

나누는 이 한솥밥이 다디달다

 


 

 

문성해 시인 / 급전

 

-죽은 시인을 문상하러 가는 길에 전당포를 만나다

그 앞에서 서성거렸을 가난한 시인의 저녁을 떠올리다

 

 

전당포를 보면

무언가 맡기고 싶어진다

금니 때운 것부터 지갑에 만년필까지

내 가진 것 다 맡겨놓고

야금야금 수혈 받듯

돈을 가져다 쓰고 싶다

 

그곳의 늙다리 주인은

내 가진 것 중 나도 모르는 보물을 찾아내어

급전을 해 줄 것만 같다

 

내 밟은 길 중

가장 닳고 닳은 길은

집에서 전당포 가는 길

 

어느 날 나는

그에게 헌신짝처럼 버려져도 좋을 것 같다

 

그리하여 이다음 생은

내 맡긴 것들을 하나 하나 찾아오는 일에 바쳐져도 좋을 것 같다

 

전당포를 보면

무언가를 찾고 싶어진다

 

 


 

문성해 시인

1963년 경북 문경에서 출생. 영남대 국문과 졸업. 1998년《매일신문》 신춘문예, 200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자라』 『아주 친근한 소용돌이』 『입술을 건너간 이름』 『밥이나 한번 먹자고 할 때』 『내가 모르는 한 사람』 이 있다. <대구시협상> <김달진문학상 젊은시인상> <시산맥 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