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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황정산 시인 / 허수아비 때리기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1. 13.

황정산 시인 / 허수아비 때리기

 

 

 한 사람이 옷을 입고 서있다 자세히 보면 옷을 들고 서있다 그가 입은 것이 바로 그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옷이라 부르지는 않는다 하늘을 나는 새들이 아니라, 그에게 총을 쏘고 돌팔매를 던지는 사람들이 그를 세우고 옷을 입힌다 그래서 아무도 그를 믿지 않는다 그를 세운 사람들은 다시 옷을 입고 두 팔을 벌려 환대하는 또 다른 그들이 되기도 한다 사람들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에 사람이었던 사람이 걸음을 멈춘다 결국 그는 그가 없었던 곳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들판에 누군가 서있다

 나는 것들이 벗어놓은 무게를 그가 걸치고 있다

 모든 것을 맞으며 서 있지만

 그가 벌린 두 팔에 안기는 것은 없다

 밟고 선 그림자 발을 감춘다

 

 허수아비가 서 있다 한 사람이 그 아래 눕는다

 

-계간 『열린시학』 2022년 가을호 발표

 

 


 

 

황정산 시인 / 빻다

 

 

밤길 차창에

날벌레들이 부딪는다

소리도 미동의 충격도 없다

다만 몸을 빻아 죽음을 기록한다

날았던 한 순간을 사선을 그어 증명한다

차창을 움켜쥔 글자들이 쉬이 지워지지 않는다

알약을 빻으며 일몰후 해상박명을 떠올리다

유봉유발을 두고 시인이 된 사람이 있다

그가 빻은 것들이 엉겨 글자가 된다

아니 빻아져 글자가 되지 못한다

빻아져 다시 빻는다

모두 빻다

 

-계간 『시와 문화』2022년 가을호 발표

 

 


 

 

황정산 시인 / 이인칭 메타적 독자 시점

 

 

 편지를 보고 있는 나를 그가 되어 바라보는 것은 에이젠시테인 이후의 일이지만 이제는 이미 옛날 일이어서 나를 그라 부르지 않는 그들이 나의 글을 읽지 않고 너라 말하는 일이 많아 나는 문을 닫지 않고 읽기를 계속하는 그가 되고 있어 너가 아닌 나는 “새로운 시선 변화의 부담을 덜고 더 유익한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비밀에 딱 맞는 지원과 가이드, 도구를 찾아”*가는 그가 되는 너로 바뀌는 나를 읽는다

 

* 메타에서 온 홍보문구를 의도적으로 오독한 문장

 

-계간 『시와 문화』2022년 가을호 발표

 

 


 

 

황정산 시인 / 어려운 시

 

 

 시가 어렵다고?

 그래서 외면받는다고?

 

 일단 쉬운 문제를 풀어봐

 세 명의 사형수가 있었어 간수가 이들에게 문제를 냈지 답을 맞추면 풀어주고 틀리면 사형을 집행하는 조건을 달았지 구름 모양 모자 3개와 꽃 모양 모자 2개가 있는데 눈을 감게 하고 세

 사람에게 모자를 씌웠지 그런 다음 다른 두 사람이 쓴 모자를 보고 자기가 쓴 모자의 모양을 맞추게 했어 사형수1은 한참을 생각하다 모른다고 답했어 사형수2도 오래 고민하다 역시 모르겠다고 했지 오답을 말하고 죽기보다는 포기하고 감옥에서라도 조금 더 사는 것을 택한 거지 그런데 앞을 볼 수 없는 장님인 사형수3은 자신이 맞출 수 있다고 하면서 정말 자기가 쓴 모자의 모양을 맞추는 거야 그는 보지도 않고 어떻게 답을 찾을 수 있었을까?

 

 어렵다고? 그래도 애써 문제를 푸는 동안 그들이 쓴 모자는 실제로 구름과 꽃이 되고 그들이 꿈꾼 자유는 더 간절해지지 않아? 보이지 않는 것들은 이렇게 보이게 되는 거야

 

 클릭 한 번이면 되는 쉬운 세상에 시가 어려워지고 있다고?

 아니야 쉬운 것은 없어

 만약 있다면 그것은 들추기 힘든 모자 밑에 감춰져 있어

 

 그래서 답이 뭐냐고?

 어려운 시를 읽듯 다시 천천히 생각해 봐

 쉽지는 않아

 

-계간 『시와 문화』2022년 가을호 발표

 

 


 

황정산(黃貞産) 시인

1958년 목포에서 출생. 고려대학교 불문학과 및 同 대학원 국문학과 졸업. 1994년 《창작과 비평》으로 평론활동 시작. 2001년 《현대시문학》으로 시창작 활동 시작. 2002년 《정신과 표현》으로 시 등단. 저서로는 『작가론 김수영 총서』, 『주변에서 글쓰기』 『쉽게 쓴 문학의 이해』등이 있음. 현재 대전대학교 교양교육원 교수. 월간 『우리詩』 부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