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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생 시인 / 벽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1. 13.

김생 시인 / 벽

나는 강철 심장을 가졌으므로

무관심할수록 더 단단해진다

세상은 온통 고아원이야

높은 강성을 가진 나는 허약한

말일수록 더 꼿꼿이 직립으로 버틴다

너는 내게 안부 인사를 건네고

안부를 거두어간다

너는 매일 밤 얼굴 없는 초상을 그린다

실체는 없고 이미지만 만삭인

팔다리가 출렁이는

지난 것을 말끔히 지우고 복귀하는

것들은 섬뜩하다

일시에 증거인멸에 동참한 밤의

혐의자처럼

너는 다이어트 중에 케이크를 받고

소문 속에서만 존재한다

천천히 소모되는 치밀한 안녕

​​

-시집 『여기는 눈이 내리는 중입니다』, 현대시학, 2019

 

 


 

 

김생 시인 / 눈 내리는 저수지

 

 

늙은 마담이 나를 본다 나는,

백태 낀 눈으로 눈을

받아 마시는 저수지를 본다

저수지는 건들거리는 바람의 장난을

그윽한 노래로 바꿔 불렀다

저수지는 말 없는 나를 채근하지 않고

검은 옷에 묻은 슬픔을 묻지 않았다

상갓집에도 없을 슬픔을 간직한 저수지

나는 가슴을 여미며 묵상의 자세로 서 있었다

세상의 뒷문으로 버려진 소문은

저수지에 와 고이고

소문의 관은 검은 나무에 걸리었다

그러나 저수지는 죽음의 환(幻)과 썩은 고요만

있는 것은 아니라서

눈을 마시고 노래하는, 늙지 않아도

늙은 마담을 만날 수 있다

저수지에 눈이 내린다

 

 


 

김생 시인

전북 고창에서 출생. 2014년 《시인동네》 등단. 시집으로 『여기는 눈이 내리는 중입니다』 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