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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영곤 시인 / 별빛 사과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1. 13.

김영곤 시인 / 별빛 사과

사과처럼 가만히 앉아 있으시오*

사과 한 알을 깎고 있다

사과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까 아직도 사과의 바깥입니까

밀어내고 있다

매순간 사과에게로 떠나지만

별 모양의 씨방이 펼쳐진다

사과처럼 앉아 당신은

사과가 아니다 그 사과는 언제나 시간의 맨 앞에 있다

그 사과에 닿으려고 할 때마다

활시위를 당기는 듯 짜릿한 야성의 맛

당신은 야생사과처럼 뿌리 깊게 앉아 있다

비탈을 꽉 쥐고 있는

나를 향해 손을 뻗고 있다

툭 튀어나올 듯,

칼날처럼 아름다운 별빛으로

​​

*화가 세잔이 초상화를 그릴 때 볼라르에게 했던 말.

​-시집 『둥근 바깥』에서

 

 


 

 

김영곤 시인 / 편백나무 자서전

착한 남자라고 낙인찍힌 편백숲으로 갔다

뿔을 숨기느라 그림자가 무거웠다 활활 숨가루를 처방해주는 편백 향이 좋았다

향기가 분다. 잎새가 부려놓은 귓속말처럼 달콤한 향기 편백 나뭇가지 사이로

햇살 한 두루마리 기다랗게 풀며 내려온다

그림자의 그림자에 걸려 눈부시게 혼절하다

헹구며 튀어 오른다 새하얀 살점이 한 움큼은 뜯겼으리

제 몸을 뜯어주는 두루마리가 좋았다 버려도 다시 돋아나는 흔적, 아무 말 없이 닦아주는 참 착한 사람이군요 라는 말에 휴지처럼 칸칸이 뜯어주었다

점점 사라져가는 내가 거기에 있었으므로

변기 물을 내릴 때 콰르륵 지하로 방출하는

좋은 사람을 문밖으로 내보는 기분이었다

뿔의 그림자가 누군가의 두두마리가 되기까지

 

-시집 『둥근 바깥』에서

 

 


 

김영곤 시인

경상북도 청도에서 출생. 배재대학교 대학원 한국어문학과 박사과정. 계간 『포지션』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 저서로는 시집 『둥근 바깥』 과 논문집으로 『최문자 시에 나타난 여성성 연구』가 있음. 배재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