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곤 시인 / 별빛 사과 사과처럼 가만히 앉아 있으시오* 사과 한 알을 깎고 있다 사과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까 아직도 사과의 바깥입니까 밀어내고 있다 매순간 사과에게로 떠나지만 별 모양의 씨방이 펼쳐진다 사과처럼 앉아 당신은 사과가 아니다 그 사과는 언제나 시간의 맨 앞에 있다 그 사과에 닿으려고 할 때마다 활시위를 당기는 듯 짜릿한 야성의 맛 당신은 야생사과처럼 뿌리 깊게 앉아 있다 비탈을 꽉 쥐고 있는 나를 향해 손을 뻗고 있다 툭 튀어나올 듯, 칼날처럼 아름다운 별빛으로 *화가 세잔이 초상화를 그릴 때 볼라르에게 했던 말. -시집 『둥근 바깥』에서
김영곤 시인 / 편백나무 자서전 착한 남자라고 낙인찍힌 편백숲으로 갔다 뿔을 숨기느라 그림자가 무거웠다 활활 숨가루를 처방해주는 편백 향이 좋았다 향기가 분다. 잎새가 부려놓은 귓속말처럼 달콤한 향기 편백 나뭇가지 사이로 햇살 한 두루마리 기다랗게 풀며 내려온다 그림자의 그림자에 걸려 눈부시게 혼절하다 헹구며 튀어 오른다 새하얀 살점이 한 움큼은 뜯겼으리 제 몸을 뜯어주는 두루마리가 좋았다 버려도 다시 돋아나는 흔적, 아무 말 없이 닦아주는 참 착한 사람이군요 라는 말에 휴지처럼 칸칸이 뜯어주었다 점점 사라져가는 내가 거기에 있었으므로 변기 물을 내릴 때 콰르륵 지하로 방출하는 좋은 사람을 문밖으로 내보는 기분이었다 뿔의 그림자가 누군가의 두두마리가 되기까지
-시집 『둥근 바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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