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아 시인(수원) / 스프링벅
노트를 펼치자 칼라하리 사막이 보인다. 스프링벅의 발굽으로 내 노트엔 많은 것이 지나갔다. 불길을 따라가면 강이 나온다고 적혀 있다.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가 사는 스프링벅은 위험하다. 펼쳤다. 집히는 갈피마다 스프링이 튕겨 오른다. 스프링을 달고 있는 뿔들 어떤 형태로 묘사해야 할지 전전긍긍하다 달를 놓친 날 무릎들로만 걸어가는 가족을 본다. 다른 사람의 입을 빌려 말을 하고 말없는 무릎들이 낡은 버스를 타고 질주의 좌석에 앉아 있다. 엎질러진 기억를 줄줄이 엮어 끌고 오는 구름의 뒤통수를 아버지라고 불러보려다 앞만 보고 달리는 스프링벅를 생각한다. 스프링 노트를 찢다보면 바위산을 오르내리며 푸른 풀밭을 찾아 떠도는 뿔만 남은 산양들이 있다.
최정아 시인(수원) / 구름모자를 빼앗아 쓰다
한 떼의 구름이 내게로 왔다. 한쪽 끝을 잡아당기자 수백 개의 모자들이 쏟아졌다. 백 년 전에 죽은 할아버지 의 모자도 나왔다. 그 속에서 꽹과리 소리와 피리 소리도 났다. 할아버지는 끝이 뾰족한 모자를 쓰고 어깨 흔들며 춤을 추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아버지는 삼십년 전에 죽은 아버지의 모자를 긴 손에 들고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나는 그 모자 속에서 망사 모자를 집어 들었다. 망사 모자를 쓰자 세상도 온통 모자로 가득했다. 빌딩이 모자를 쓰고 있었고, 꽃들은 모자를 벗겨달라고 고개를 흔들고 있었고, 새떼들은 모자를 물고 날아갔다. 수세기에 걸쳐 죽은 친척들도 줄줄이 모자를 쓰고 따라오는 것이 보였다.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고 할아버지는 꽹과리를 치고 새들은 노래를 부르고 나는 그들을 데리고 바다로 간다. 둥둥둥 북을 친다. 풍랑에 빠져죽은 영혼들이 줄지어 걸어 나온다. 파도에게 모자를 던져준다. 모자를 쓴 파도가 아버지처럼 걸어온다. 갈지자로 걸으며 손을 흔든다. 친척들은 환하게 웃으며 춤을 춘다. 아버지가 두루마기를 입고 넘어진다. 그러나 아버지는 영영 일어서지 못한다. 아버지 모자를 다시 구름이 빼앗아간다.
-최정아 [2009 매일신문 신춘문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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