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오 시인 / 세트장
너와 돌 사이에서 소리 질렀다. 너와 돌과 너와 돌과 조금 갈라지는 피부.
폐교 안에 있었다. 계단을 오르며 꿈이 설계되고 있음을 알았다. 꿈은 벌써 며칠째 숲을 부수고 빈터를 지었다. 그곳에 너를 서 있게 하려나 보다.
벽을 부수며 뻗어나가는 실금. 내가 내 눈앞에서 순식간에 손바닥을 펼쳤던 순간. 나는 고개를 숙이고 바닥에 떨어진 슬레이트들을 주웠다.
춤과 뼈와 춤과 뼈 조금 흔들리는 살.
옥상은 낙하 장면을 도왔다. 바닥이 노출되기 전에 건물은 절단되었다. 죽음이 내레이션으로 처리되었다.
그저 나긋하고 부드러운 움직임만이, 콘크리트와 병치되어 있는,
결말부.
몇십 년 동안 모은 거야. 너는 죽은 잎들로 가득한 채집통을 내게 건넨다. 다리가 많이 아팠다고 탱탱 부었다고 웃으면서.
-시집 <세트장>에서
김선오 시인 / 사랑을 위하여
사랑을 위하여 창문에 선을 긋는다. 가로로 길을 자르고 세로로 구름을 자르고 우리는 사랑을 위하여 점으로 진입한다. 사랑을 위하여 터널 속에 비가 내린다. 수만 개의 점들이 시간을 적신다. 사랑을 위하여 우리는 체온을 내리고 사랑을 위하여 몸 밖에서 잠들어본다. 터널 안으로 조금씩 밀려오는 풍경들, 이 어둠을 꿈속으로 몰아내려나보다. 발자국이 떠오른다 발자국이 허공에 잠긴다. 얼굴 위로 쏟아지는 점, 범람하는 면, 그런 것들이 번갈아 사랑을 하는 동안 나는 아침을 참는다. 내게서 뻗어나가려는 아침을 참아내고 벽돌을 품안으로 밀어넣는다. 품을 높게 쌓아올린다. 내가 마련한 것들이 네 마음에 들지 모르겠다. 그러나 사랑을 위하여 분주하고 사랑을 위하여 흩어진다. 우리는 사랑을, 사랑의 편에서 하기 위하여 벽돌을 던진다. 점을 깨트리고 장마를 시작하자 사랑을 위하여 등이 깨지는 사랑을 위하여, 머리카락이 바닥을 향해 걷잡을 수 없이 자라나는 사랑을 위하여, 서서히 낙하하는 거대한 연을 위하여, 연을 덮고 잠든 땅의 꿈 밖으로 우리의 윤곽 우리의 커브 우리의 실핏줄 모두 검은 글자 되어 떠내려간다. 더 짙어진 터널 이대로 사랑을 위하고, 차창에 실려가는 노란 조명 피딱지 같은 꽃들 그러나 멀리서 네가 달려온다. 이곳으로 살아난다. 벽을 향해 뻗어나가는 손가락, 사랑을 위하여 오늘, 오직 김 서린 사랑을 위하여.
계간 『문학동네』(2021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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