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식 시인 / 가난
당신 생각이 저렇게 두서없이 흩날려도 되는 것일까?
속절없이 또 눈발은 날리고
산골 버스에서 내린 한 낯선 여인이 눈길을 걸어가네
한겨울 산간벽지에 손님이 찾아오는 일은 부귀영화보다 따사로운 호사
가난이 어찌 배고픔뿐이랴
나는 먼데 사람이 궁금해 손바닥으로 눈을 받아 눈점(卜)을 쳐본다
손바닥에서 녹은 눈이 방울지면 그도 나를 생각하는 거라는 속설
가진 거라곤 적막뿐인 집에 산까마귀들이 내려와 왼종일 부산을 떨다 갔다
이내 뱀처럼 긴 밤이 와서 차갑게 식은 나를 삼키고 오래오래 뒤척일 것이다
이선식 시인 / 시간의 목축牧畜
청구서가 구인영장처럼 들러붙은 서류를 받아들고 끙끙거리다가 사무실을 나섰다 어딘가에는 시간의 출구도 있긴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기도 하다가 사랑을 만날지도 모른다고 거리를 배회하는 개처럼 걷게 하는 건 생에 대한 애착인가 소 엉덩이에 말라붙은 소똥처럼 시간의 엉덩이에 눌어붙어 있는 이 난감한 생의 한 구간을 나도 누구에겐가 결재 올리고 싶어졌다
매봉역에서 양재역을 지나 강남역까지 목적 없이 걸었다 시계를 빠져나온 시계 바늘처럼 그 거리를 시간으로 환산하는 디바이더 두 다리가 시계 바늘처럼 째깍째깍 걸어간다
리어카 위에서 하늘로 뻗은 다리들이 양재역에 도착하는 바람 속을 걷고 있었다
봄이 오고 있었다 봄, 분 냄새를 풍기는 시간의 유혹 마치 어느 신이 자신의 정적 속에서 꺼내놓은 것처럼 봄은 신행길처럼 찾아오지만 기억의 가시 끝에 피는 꽃처럼 주기적 통증 같은 것
저 생명보험 출구에서 흘러나오는 시간이 보이지 걱정하지 마라 저 시간이 너를 지켜줄거야 푸르덴셜생명 앞에서 콧수염을 기른 아버지가 무표정한 얼굴로 늦둥이 아들의 손을 잡고 서 있는 것을 보았다
호명처럼 햇빛의 손끝이 닿는 곳마다 나무 껍질 속에서 스멀스멀 알에서 깨어나는 시간의 번식처럼 톡톡 터져 나오는 꽃들 태양은 모든 사물의 실존을 그림자로 기록했고 산고 속에 태어난 하루 또 하루 삶은 한 발짝씩 죽음 쪽으로 진화해 나아갔다
강남역 부근에서 하반신에 타이어를 입고 기어가는 수평의 시간과 나의 직립의 시간이 교차했다 교차하는 시간의 현에서는 비파 소리가 났다
현이 울 때 내 질투가 낳은 불평의 도끼가 발등에 떨어졌다 네 불평은 목초지의 무성한 풀이 발목에 감긴다는 것
세상을 움직여 가는 것은 방마다 걸려 있는 저 둥근 시간 모두를 시계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에서 기계처럼 작동했다 주인의 가축들이 우리로 돌아가는 저녁 목초지에 풀어놓은 양처럼 나는 시간의 우리 안에서 억센 고뇌를 우적우적 씹어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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