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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해자 시인 / 해자네 점집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1. 14.

김해자 시인 / 해자네 점집

 

 

 해자네 점집

 술은 좋아하지만 술 마시면 눕지 못하는 지병이 있는 그 여자, 술이 출렁거리는 머리에 무슨 책이 들어오리요만, 딸내미 머리맡에 차곡차곡 쌓인 책은읽어졌다는데 그 딸내미도 참 희한하지, 전문 컴퓨터 하나 빼면 주역 사주명리학 애니어그램에 점성학 타로까지 동서양 기기묘묘한 학들이 도표와 그림 속에 들어 있었다는데

 어느 땐가 그 여자 기초수급자를 위한 소양 교육이라는 것을 갔다, 시무룩 진짜 수급자처럼 앉아들있는 통에 금방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눈매 하나찍어서 실실 타로 점을 봐주기 시작했다는데, 그렁그렁 눈에서 눈물이 쏟아지고야말았고 눈물이 강물이 되어 한번 휘몰아 간 뒤에, 지퍼 속에 갇힌 입들이지퍼를 열고 나와 저도요 저도요 하는 통에 수업을몽땅 타로 점 봐주는 일로 공치고 말았다는데쫓겨나고 이혼하고 망하고 언제 바닥치고 손목 긋고 꽁꽁 짜매는 이야기가 술술 쏟아졌다는데, 그라도 지가 글쓰기 선생으로 왔는데요, 오늘 풀어놓으신 야그를요, 고대로 써가 오시믄 사주도 봐드린다카이, 그다음 주 소설 같은 인생 읽어내느라 날밤 새웠다는데

 내는 단 하나뿐인 당신이란 별을 보고 있데이, 사람살이가 뭐꼬, 밥 나눠 묵음서니캉내캉 가심에든 이야그 들어 돌란 것 아이겠나, 일하고 놀고 술 먹는 뒤끝마다 신빨 영빨 차곡차곡 쌓은 그 여자 슬슬 영업을 개시했다는데, 말 이을 새도 없이 저짝에서

 오대양 육대주가 쏟아져나와이짝에선 듣기만 했다는데, 억수로 고맙다고 오천 원 만 원 마빡에 붙여줘서 2차 3차 술값도 계산한다더니이리 서로 올려다보이 얼매나 좋노? 쪼매만 기둘려보래이, 고마 꽃멍울이 꽃때옷될 날이 올끼니까네, 뻘소리 치던 그 여자 어느 날은 만만한 내 이름두 자 빌려 돌라더니, 걸어댕기는 점집을 차리고 말았으니 그 이름하야 해자네 점집이라 카더라

 


 

 

김해자 시인 / 머리말에 막걸리 두 병 놓여 있었다

 

 

붉은 접시꽃 옆에

다수굿이 서 있던 살구나무 집 어매

반나마 없어진 이를 가리며 합죽 웃었다

술 있시믄 한 병 빌려줘유 낼 트럭 오믄 갚으게

테리비는 지 혼자 뭐라뭐라 떠들어대지

껌껌하니 나갈 수가 있나 이야기 할 사람이 있나

술이라도 없었으면 어찌 살았을까 몰러 질고 진 밤

후루룩 김치 국물이나 마시다 곯아떨어지는 겨

고대로 가는 중도 모르게 갔시면 좋겟네

희망근로 새겨진 노란 조끼 입고

새벽같이 빗자루 들고 나다니더니

고추밭 이랑에 엎드려 있더니 어느 날은

콩밭 매다 호미처럼 구부리고 주무시더니,

청국장 띄우는 집 들러 김 모락모락 나는

콩 몇 알 뭉쳐 자시고 정신 오락가락하는

친구 집 들러 코피 한잔 나눠 자시고

허청허청 집으로 가더니 고대로 가셨다

머리맡엔 막걸리 두 병이 댕그마니 놓여 있었다

 

 


 

김해자 시인

1961년 전남 신안에서 태어나 목포에서 자람. 고려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8년여 조립공 시다 미싱사로 일함. 1998년 《내일을 여는 작가》를 통해 등단. 제8회 '전태일문학상'과 2008년 '백석문학상' 수상. 시집 『무화과는 없다』 『축제』 『집에 가자』 『해자네 점집』 『해피랜드』. 현재 진보생활문예지 「삶이 보이는 창」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