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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안녕 시인 / 안개 낀 강 외 9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1. 15.

김안녕 시인 / 안개 낀 강

 

 

살다 보면 명확한 것보다 불분명하게 흘러가는 게 더 많다

그렇다 마치, 안개 낀 날처럼.

삶이란

한 손의 고등어처럼 손으로 잡을 수도

토막 낼 수도 없는데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연기 같은 것들

숨통을 틀어막고서는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섬진강에 와서야 나는 저 안개의 진의(眞儀)를 조금 알 듯도 하다

그래 때론 모호한 것이

더 튼튼한 뼈대를 세우고 기둥을 만들고

저렇듯 강 같은 집을 짓게 한다

물은 말하고 있다

저 컴컴한 안개를 퍼 올리며 앞으로 가라고

표지판 없이도 잘 나는 한 마리 물총새가 되라고

허벅지를 철썩철썩 때리면서

새벽 세 시의 섬진강이 내게 말하고 있다.

 

 


 

 

김안녕 시인 / 구멍

 

 

오래 기다린 사람

기다리는 버스가 오지 않을 때

토큰 구멍 속으로 세상을 들여다보라

둥근 바퀴 둥근 뒤통수 둥근 햇살 둥근 하늘

새삼스럽게 세상은 둥근 것투성이다

현명하거나 혹은 어리석은 기다림이라 할지라도

팽팽한 기다림의 끈조차 둥글어질 때까지

찔끔 눈물 한 방울 둥글게 떨어질 때까지

세상을 한번 굴려 보라

그러면

구르지 않는 것들조차 함께 굴리며

길들은 껄껄 웃기도 하는 것이다

삭풍조차 둥글어지는 길들의 저녁, 저녁의 길들

한 번도 마중 나가 보지 않은 동구 밖을 가듯이

탐조등도 없는 갱도의 둥근 어둠 속을 가듯이

이제 나는 너를 기다려 보기로 한다

비 오는 여름날 양철냄비에서 건져낸

삶은 감자 냄새 피어오르는 해거름녘

둥근 지붕의 집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공이 튀어 오른다

기다림이 통통 튀어 오르고 있다.

 

 


 

 

김안녕 시인 / 재떨이

 

 

얼마나 많은 숨소리가

얼마나 많은 근심의 입술이

이 바닥 위에 떨어졌을까?

누렇게 뜬 얼굴들이 순식간에 지나간다

축축한 그리움 같은 것들을 말려대느라

필시 저 바닥은 절로 눅눅해졌을 것이다

오래 묵은 근심 오래 묵은 사랑 오래 담아 둔 미움 같은 것들이

연기처럼 지나간 자리, 자리

 

아버지는 30년도 넘게 피운 담배를 얼마 전에 끊으셨다

아버지는 이제 다른 소일거리로

그리움들을 말리곤 하신다

허브 향의 사탕을 깨물거나 껌을 씹거나

그러면서 불태워지는 것들도 있고

끝끝내 타지 않은 채 팽팽한 줄타기를 벌이는

시간도 있다

 

아, 얼마나 긴 숨들이 이 다리 위를 지나갔을까

아버지의 손때 묻은 재떨이를 씻어 말리다

문득 우우 우울, 깊은 우물의 냄새

아버지가 지나간 자리에 웅크리고 있는

도마뱀 같은

얼룩무늬의 세월,

통증도 없이 빠져나간 시간의 갈비뼈.

 

 


 

 

김안녕 시인 / 담배 피는 여자

 

 

담배 피는 모습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101호 할머니

치매 걸린 지 5년 된 그녀를

동트는 새벽 무렵이면 공원 앞에서 마주칠 수 있네

잔꽃무늬의 푸른 고무치마를 움켜쥐고

한 숨 한 숨 빨아들이는 그 모습

어쩌면 그녀는 도통(道通)한 건지도 모르겠네

백내장 낀 두 눈에도

바람만은 청량하게 부는 유일한 시간.

담배 피울 때 그녀에게선 물결이 이네

잔주름 치마에서도 달달 떨고 있는 손끝에서도

자근자근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네

 

이른 아침 담배 사러 나갔다가

나는 또 그녀와 마주치고 말았네

나를 아는 그녀,

그녀는 나를 보고 맹랑하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한통속이라고 기특해했을까?

어쨌든 그녀는 내 인사에 흐뭇하게 웃어 주었네

방긋 웃는 그녀의 입가에서도 이제는 파문이 이네

세월이 만들어낸 길의 파문.

깊은 것이 오직 강물만은 아니라고

알고 보면 세월이란 것도 강물처럼

침잠된 마음까지 끌어안으며 흐르는 거라고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그녀의 하루가

슬며시 내게 말 걸어 오고 있네.

 

2000년 《실천문학》 신인상 당선시

 

 


 

 

김안녕 시인 / 불량 젤리

 

 

솔직히 말할까 익살꾼의 농담보다

담배 연기 한 줌

날 깔깔 웃게 만든다고

 

내 침대 밑에는 도루코 칼

말라비틀어진 중국산 담배

빨강 초록 불량 젤리 덩어리들

 

놀다 지칠 땐

젖은 걸레로 악취나 닦아 보자

어디서 왔는지 모를 냄새를 빼내기 위해

 

봄이 와도

베란다엔

알 수 없는 것들 넘쳐나고

 

말해 볼까,

너의 배꼽보다 피어싱을 더 좋아해

네 말보다

자꾸 깨물어 버리는 혀를 더 확신한다는 거

 

볼록한

젤리를 씹으면서

씨익 웃는다는 거

 

-시집 『불량 젤리』(삶창, 2013) 수록

 

 


 

 

김안녕 시인 / 사랑의 발견

 

 

낮과 밤

이불 속으로 눈이 내린다

귓속엔 자벌레들이 혀 짧은 소쩍새 털 많은 사내가 살아

가려운 것투성이

 

아이비 이파리는 심장 모양

사람 눈에는 그 사람의 심장이 올라와 있다는데

 

마스크를 쓰고부터는

웃음 비웃음을 다 가릴 수 있고

연습하지 않았는데 연기가 늘고

 

유일하게 늘지 않는 것은 시와 사랑이다

안 풀리는 4번 문제를 종일 풀고 있다

꿈에서도 현실에서도 시를 망친다

 

마음을 먹는 대신

미움을 먹으려 하지만

마음과 미움은 한 끗 차이지만

 

땡감이 비에 떨어지고 무화과 열매가 익고

잠글 수 없는 냄새처럼 열병이 퍼지고

모르는 순간 내게로 건너온 참혹은

물혹이 아니라서 칼로 도려낼 수도 불로 지질 수도 없다

 

씹다 붙인 껌처럼

사랑만큼 근력이 필요한 종목도 없다

 

-시집 『사랑의 근력』(걷은사함, 2021) 수록

 

 


 

 

김안녕 시인 / 모래와 미래

 

 

그것은 눈 속에 있었다

눈을 뜨기 힘들었다

아프리카 코끼리가 어깨를 짓누르는 기분

어깨가 좀 익숙해질라치면 수십 톤 날파리가 밤을 휘젓는다

 

그것을 훔쳐 쌀을 사고 기름을 땠다

모래주머니를 달고 달리는 마라토너처럼

그래도 달려, 달려야 했다

 

그것은 어디에나 흔했는데

놀이터에도 강변에도 흔해 빠진 게 모래였는데

옆집은 그걸로 밥을 지어 먹고

우리 집은 그것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고

어느 날엔 그것이 입속에서 종일 버석거리는 사태가 벌어졌다

 

모래를 지어야 해

모래를 더 많이 날라야 해

입자 고운 모래를 별처럼 반짝거리는 모래를 모래를!

모래 아니면 죽음을 달라!

 

모래는 영원하니까 모래는 희망이니까

 

드디어 영영 눈을 못 뜨게 된 나의 기일

매트리스 같은 모래 위에 이제야 마음 놓고 누워 보는구나

 

배를 가르면

피보다 진하고 물보다 무거운

모래가 모래가

 

계간 『포지션』 2022년 봄호 발표

 

 


 

 

김안녕 시인 / 대전발 영시 오십분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엄마는 평생 달걀 한 꾸러미를 들고 걸었다

누가 멀리서 봤다면 아기라도 안은 줄 알았을 텐데

 

용산역 안 그는 휴대폰을 들고 뛰었다

바통을 쥔 것처럼 절박해 보였다

힘내세요, 라고 말했다면 좋았을까

 

머리통만 한 수박을 안고 가는 사람

머리통만 한 수박을 팔러 가는 사람

중얼거림을 들고 가는 사람

제 입을 버리고 걸어가는 사람

마스크가 제 얼굴이 된 사람

구름을 쓰고 가는 사람

고양이 걸음을 흉내 내며 가는 사람

 

끝내 사람이길 포기하고 걷는 사람

 

기차를 타러 나왔는데 행선지가 생각나지 않아

가만히 기다린다

 

대합실은 소란과 고요를 반복한다

이럴 때엔 헛기침이 소용 있다

 

지금 몇 시더라,

시계가 없는데도 손목을 들여다보며

올 사람이 없는데도 이쪽저쪽을 돌아보며

 

돌아갈 곳 있는 사람*처럼

행선지를 떠올린다

 

* 김명기 시집 제목 『돌아갈 곳 없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를 변용.

 

계간 『동리목월』 2022년 봄호 발표

 

 


 

 

김안녕 시인 / 영원한 나라에서

 

 

어느 인디언 부족은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을 그대라 부른다

숨 붙어 있는 기린과 코끼리 지렁이와 거미

찔레나무 발에 차이는 돌멩이

 

그대라고 호명하면

없는 그대가 멀찍이 사라진 그대가

곁인 것 같다 살아 있는 것 같다

 

기척처럼 기침처럼

받아 적은 말들이 이렇게 나로 남아 있다

 

붉어진 두 눈이 세상에 그득해서

 

산수유가 익는다

끝끝내 오디가 떨어진다

 

 


 

김안녕 시인

1976년 경북 고령에서 출생, 2000년 《실천문학》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툼활동 시작. 시집 『불량 젤리』, 『우리는 매일 헤어지는 중입니다』, 『사랑의 근력』 펴냄. 2022년 길동무 문학창작기금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