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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조율 시인 / 적도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5.

조율 시인 / 적도

 

옥탑방 평상에 앉아 수박에 칼을 찔러 넣는다

수박의 적도부근이다 지구본으로 따진다면

한 중앙에 에콰도르의 어느 도시 정도가 되겠지

이곳은 뜨거운 열대우림, 곰팡이가 타잔처럼 천장을오르는 옥탑방,

생각한다, 왜 나에게는 선글라스 끼고

일광욕을 즐기는, 그런 적도가 지나가지 않는가?

눅눅한 근로계약서에 손가락을 빌려줄 때마다

낮은 태양이 양철지붕 위로 더 무겁게 녹아 붙는다

가로줄이 많은, 빈칸이 많은, 적도가 많은

주름진 종이 속에는 엷은 비늘이 숨어 있다

적도를 벗어난 열대어의 서글픈 눈망울이 끔뻑인다

온통 경력자들만의 광고 박스, 열대성 기후

지구의 허리춤을 적도가 점점 조이고,

조여 오면 이거 벨트에 구멍을 하나 더 뚫어야 하나?

난간에 서서 입 안에서 우물거리던 수박씨를 뱉는다

내가 맞히지 못한 뒤통수들은 달동네 엉킨 오르막을 왜 그리 가뿐히 풀어내는가?

수박씨 속에도 적도가 있다던데 그곳은 영영 바람 한점 없단 말인가?

이천 원짜리 금간 수박에서, 무너진 신발장

경첩과 경첩 사이에서, 경력과 초보 사이에서 도려낸 적도,

언제나 남은 절반은 절반을 닮아간다

바지랑대를 세워 하늘을 갈라본 적도,

구름을 베어본 적도, 적도부근에 가본 적도 없지만

바람 잘 날만 있는 이곳은

언제나 바싹 말라가는 무풍지

 

 


 

 

조율 시인 / 어머니가 기와를 먹는다

 

 

모서리 깨진 기와 한 장, 마당에 버려져 있다.

한때는 하늘을 받쳐 들고

처마 밑에 제비도 키우던 검은 기와,

누가 모서리를 베어 먹었을까

햇빛을 갉아먹던 등이 검게 굽었다

나는 어금니에 금이 간 어머니를 의심했다

국수 같은 장대비가 지붕을 두드리던 날,

어머니는 부엌에서 자글자글 기와를 구웠다

어머니의 기와에는 이끼가 가득 끼어 있었다.

또 김부각이야? 내 목소리는 비 오기 전

제비처럼 꽁지 내리고 밥상 위를 낮게 날아다녔다.

한 장 한 장, 접시 위에 기와집이 지어진다

나는 젓가락으로 김부각의 모서리를 부서뜨리며

빗물에 내려앉는 천장을 걱정했다

지붕의 기와에 금이 갈수록 어머니는

어금니가 아프다 했다

나는 월세가 밀린 어머니 품속에서

새끼제비처럼 입을 내밀고 묵었다

어머니는 아직도 빛나는

김부각을 고독고독 씹어 먹는다

뱃속에 고래 등 기와집을 짓고 있나

어머니가 어머니를 먹는다

 

 


 

조율 시인

1983년 인천에서 태어나 2013년 《한라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우산은 오는데 비는 없고』가 있다. 2007년 제7회 〈윤동주시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