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이병철 시인 / 겨울바람의 에튀드*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4.

이병철 시인 / 겨울바람의 에튀드*

 

 

 당신의 발가락은 오래된 건반, 거기서 떨어진 봄의 기억은 모두 음악이 되었다 악보를 읽을 줄도 모르면서 계속 걷는 발이 불쌍해, 발톱이 튕겨내는 겨울을 창백한 소리로 노래하며 걷고 또 걸었다

 

 내 입술은 당신의 언 발가락을 녹일 수가 없어, 햇빛을 날카롭게 갈아 굳은살을 베어내도 차가운 음계는 발끝을 떠나지 않았다 이 음악만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자, 발가락이 유리잔 처럼 깨져버릴 것만 같아

 

 폭설은 이미 잘 짜여진 한 벌의 옷처럼 우리를 감쌌고 얼음의 숨소리가 귓가에 파란 브로치를 달았다 발톱에서 솟아오른 달이 하얗게 변할수록 길은 불협화음으로 부서져갔다 유리 바다를 걸어도 얼어붙은 발에선 피가 흐르지 않았다

 

 따뜻한 바람이 발가락 사이에서 불어왔다 한 계절보다 긴 음악이 마침내 끝나가고 있었다 더는 걸을 수 없어, 언 몸을 녹이려고 끌어안았을 뿐인데, 당신은 맑은 파열음을 내며 수천 조각으로 깨졌다

 

 내가 들은 가장 아름다운 음악이었다

 

* 쇼팽의 연습곡 「Etudes」25번 중의 제11곡, A단조.

 

 


 

 

이병철 시인 / 수평선을 걷는 장화들

 

 

파랗고 맑은 냉기에도 코가 얼지 않는 우리는

언제나 싱싱한 뒤축으로 수평선을 걷는 장화들이다

그중에서도 나는 수심(水深)이 깊어질수록 바다의 과거를 잘 기억하는

오래된 가죽장화, 유빙에다 이마를 닦아 물광을 내며

아열대의 꽃잎을 흉내 내는 크릴새우를 쫓아다닌다

우리는 발목도 없이 발가락도 없이 난류에서 한류로 행진한다

캄브리아 시절에 따뜻한 바다 위를 걸어가던 신들이

탁족(濯足)을 하려고 장화를 벗어 놓았는데

그게 그만 바다에 빠져 밍크고래들이 된 것을

나는 다 발설해버리고 말았으니,

우리는 구멍으로 물숨을 쉬는 끈 없는 장화들

옆구리에다 파도를 주먹밥으로 뭉쳐 매달고 다니면

장화를 바느질하려는 수선공들을 만나기도 한다

태양에 달군 뾰족한 쇠가 내리꽂혀도

유선형의 몸은 능글능글한 데가 있어 작살을 바다로 흘려버린다

물빛 발자국들을 한꺼번에 연안으로 몰고 가면서 우리는

가죽나팔을 길게 분다, 높고 고운 소리 너머로

깨진 유리 바다가 일어서도, 장화들은 끄떡없다는 듯이

 

 


 

이병철 시인

1984년 서울에서 출생.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 한양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2014년 《시인수첩》 신인상 시 등단, 2014년 《작가세계》 문학평론 등단. 저서로는 시집 『오늘의 냄새』, 평론집 『원룸 속의 시인들』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