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녀 시인 / 더러는,
다가오지 않은 내일에 대한 두려움과 기대감 조금
줄장미 안간힘으로 기어오르던 국세청 담벼락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일몰의 한때
쟈스민 꽃잎에 묻은 과자부스러기에 줄지어 나타난 흰개미 행렬
큰 길 옆 분수대 우뚝 솟은 꼬리 달린 거인 남자 조각상으로 쏟아지는 한낮의 스콜
모래 조각 즐비한 골짜기 찾아가다 만난 소금호수 반짝이던 시간을 주머니에 넣기도 하는,
자바섬 어귀에서 아픈 몸 먼저 다녀간 라다나무 꽃잎에 피어 있는 친절함과 마주한 오후가 있는 화요일
-유고시집 <누구도 시키지 않은 일>
김길녀 시인 / 지금,
비우고 비워서 속까지 훤히 드러낸 겨울 숲 나무들처럼 몹시 좋아하는 우울과 적막과 슬픔마저도 찰나의 행간 없이 벙글 벙글 벙글 맘껏 부풀어 오르시라 다만, 식물로 태어나 나무로 살아가는 오래된 생애처럼 아픔을 감춘 채 다가오고 있는 공포만은 느릿느릿 머뭇머뭇 주저하고 망설이며 둘러보고 헤매다가 온전히, 길을 잃어 주시면 좋으리라
지금은, 누군가 지독하게 아프다는 편지를 받고 긴 겨울 안에서 함박눈처럼 쏟아지는 신의 영혼을 가득 품은 연두와 분홍과 함께 절박한 기도가 담긴 초록 오로라를 기다리며 실어증에 잠겨 있습니다
- <문학과 사람> 2020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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