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김길녀 시인 / 더러는,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4.

김길녀 시인 / 더러는,

 

 

다가오지 않은 내일에 대한 두려움과 기대감

조금

 

줄장미 안간힘으로 기어오르던 국세청 담벼락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일몰의 한때

 

쟈스민 꽃잎에 묻은 과자부스러기에 줄지어 나타난

흰개미 행렬

 

큰 길 옆 분수대 우뚝 솟은 꼬리 달린 거인 남자 조각상으로 쏟아지는

한낮의 스콜

 

모래 조각 즐비한 골짜기 찾아가다 만난 소금호수

반짝이던 시간을 주머니에 넣기도 하는,

 

자바섬 어귀에서 아픈 몸 먼저 다녀간

라다나무 꽃잎에  피어 있는

친절함과 마주한 오후가 있는 화요일

 

-유고시집 <누구도 시키지 않은 일>

 

 


 

 

김길녀 시인 / 지금,

 

 

비우고 비워서 속까지 훤히 드러낸

겨울 숲 나무들처럼

몹시 좋아하는 우울과 적막과 슬픔마저도 찰나의

행간 없이 벙글 벙글 벙글

맘껏 부풀어 오르시라

다만,

식물로 태어나 나무로 살아가는

오래된 생애처럼

아픔을 감춘 채 다가오고 있는 공포만은

느릿느릿 머뭇머뭇 주저하고

망설이며 둘러보고 헤매다가

온전히,

길을 잃어 주시면 좋으리라

 

지금은,

누군가 지독하게 아프다는 편지를 받고

긴 겨울 안에서 함박눈처럼 쏟아지는

신의 영혼을 가득 품은 연두와 분홍과 함께

절박한 기도가 담긴 초록 오로라를

기다리며 실어증에 잠겨 있습니다

 

- <문학과 사람> 2020년 봄호

 

 


 

김길녀 시인(1964-2021)

1964년 강원도 삼척에서 출생. 부산예대 문예창작 전공. 1990년 《시와 비평》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키 작은 나무의 변명』 『바다에게 의탁하다』 『푸른 징조』가 있음. 사후 마지막 시집으로 <누구도 시키지 않은 일>이 출간됐다. 제13회 한국해양문학상(시)수상. 부산작가회의 사무차장, '작은詩앗·채송화' '예감' 동인, 부산시인연대. 2003년 유방암 진단을 받고 그동안 투병. 2021년 5월 12일 타계.(향년 57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