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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휘 시인 / 아무 이름으로 불러도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13.

최휘 시인 / 아무 이름으로 불러도

 

과일 언니, 사람들은 과일 가게 언니를 이렇게 불러요 과일들이 소복이 담긴 바구니를 늘어놓고 언니는 백 년 동안 가만히 앉아 책을 읽거나 바구니 위로 내려앉은 날벌레를 쫒아요 수박의 검은 줄무늬 속이나 파인애플 껍질 속을 잘 살피면 그 언니의 이름이 살고 있을지도 몰라요

 

과일 언니는 천천히 일어나 가게 뒤로 들어가기도 해요 그리고 한 페이지를 넘긴 책장 같은 얼굴로 나와 다시 의자에 앉아 손을 휘휘 저어요 푸른 청포도 향이 잠시 날려요

 

향기를 입고 향기를 먹고 향기 사이를 걷는 언니는 어떤 향기야 라고 묻지는 못하는 사이예요 언니의 표정을 보고 시고 단 과일을 단번에 고를 수 있을 뿐이에요

 

과일 언니는 아무 과일 이름으로 불러도 다 돌아봐요 언니는 과일 속을 들락날락하며 사는 걸까요 오늘의 언니는 포도나 복숭아 일지도 몰라요 노란 껍질을 벗겨 먹는 참외일지도 몰라요

 

과일 언니 옆에 가만히 앉아 볼까요 그러면 언니가 어떤 과일을 내 올 것만 같아요 향기도 색깔도 없는 언니를 쟁반에 담아서

웹진 『시인광장』 2022년 12월호 발표​

 


 

최휘 시인

경기도 이천에서 출생. 본명: 최영숙.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화예술학과 석사 졸업. 2012년 《詩로 여는 세상》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야비해지거나 쓸모없어지거나』(詩로여는세상, 2018)와 동시집 『여름아이』가 있음. 2018년 문학나눔 우수도서 선정. 2022년 제10회 문학동네동시문학상 대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