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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윤 시인 / 풍등이 가는 곳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13.

김윤 시인 / 풍등이 가는 곳

 

 

닿을 곳도 없이

어둑어둑 저무는 바다를 본다

 

남자가 모래톱에 앉아

풍등에 불을 붙이고 있다

등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고

불빛에 비치는

남자의 얼굴은

낯선 아시아 사람

 

그의 열 받은 상처와 슬픔이

찬 술을 덥히듯

폐 가득 달구어져

지등 안을 팽팽하게 채울 때까지

바다는 알 수 없는 말로

부풀어 끓어오르고

 

등이 떠올랐다

칠흑 바다 위로

환하게 비행하는 불덩어리

한참을 바람을 타고 흔들렸는데

보이지 않는다

 

지금 풍등은

그가 살던 마을까지 흘러간 거다

뇌도 가슴도 내장도

눈물까지 다 싣고 가버려서

텅 빈 껍데기 같은 사람이

오랫동안 모래톱에 앉아 있다

 

 


 

 

김윤 시인 / 저 등

 

 

저 사람, 등으로 말거는것 봤니?

다친 등뼈 한 마리, 들판 하나를 품고 울림통이 되는 것

 

미추쯤에서 목쉰 소리 휘돌아 감는 것 들었니?

질척이는 골목길 폐쇄 회로 카메라 속에 잠긴 늙은 느티 같이 어둔

 

등판 가득 소리를 으깨며 젖어 있는 뼈들

디스크마다 우물 하나씩을 감추고 부서진 기억들 첨벙거리는 소리 들었니?

 

식구들이 잠든 캄캄한 방 앞에 저 사람 우두커니 서 있는 것 봤니?

어둠 속 솜같이 젖은 허파를 상한 등으로 바라보다가

낡은 모니터가 물속처럼 얼굴울 비출 때

손바닥 가득 깨알 같은 글씨로 소장(訴壯)을 써 들고

어디론가 기차를 타려고 긴 줄을 서는 것

 

그 기차 가득

고장 난 TV가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불 환히 켜고 흘러가는 것 봤니?

 

 


 

김윤 시인

전북 전주에서 출생. 숙명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9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지붕 위를 걷다』(문학수첩, 2004), 『전혀 다른 아침』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