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형철 시인 / 배추밭
하루가 다르게 배춧잎이 쑥쑥 자라는 것은 하늘에가 닿으려는 배추벌레가 열심히 배밀이하며 길 내기 때문이지
널찍한 배추밭이 통째로 흔들리는 것은 잠자리에 든 배추벌레가 떼 지어 하늘을 나는 꿈 꾸기 때문이지
나비 날개가 둥글디 둥근 것은 이파리 갉아먹으며 숭숭 구멍 내던 어릴 적을 필시 기억하기 때문이지
황형철 시인 / 4월 동백 –섬 3
청명을 앞뒀는데 이름도 무색하게 동백이 한창이다
큰넓궤에도 피고 너븐숭이에도 피고 빌레못굴에도 피고 섯알오름에도 피고 송령이골에도 피었다
바람 불어도 흔들리지 않게 파도 덮쳐도 꺼지지 않게 애지중지 겹겹으로 불씨 에워싸 금방이라도 타오르겠다는 듯 환하지만
삼촌이 건넨 식은 지슬 같아서 어멍이 잡아준 마지막 손길 같아서 누군가 머뭇거리다 몰래 내건 조등弔燈같아서
어쩌나 차마 고개 들 수 없다 바라볼 수 없다 만개한 숲으로 들 수가 없다 꽃이 지는 찰나에도 꽃을 붙들고 있는 그림자가 유난히 깊은 어둠 같기만 하여 붉게 뜨겁게 가슴이 타기만 하여 파리한 나무처럼 서서 한참을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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