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황형철 시인 / 배추밭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13.

황형철 시인 / 배추밭

 

 

 하루가 다르게 배춧잎이 쑥쑥 자라는 것은 하늘에가 닿으려는 배추벌레가 열심히 배밀이하며 길 내기 때문이지

 

 널찍한 배추밭이 통째로 흔들리는 것은 잠자리에 든 배추벌레가 떼 지어 하늘을 나는 꿈 꾸기 때문이지

 

 나비 날개가 둥글디 둥근 것은 이파리 갉아먹으며 숭숭 구멍 내던 어릴 적을 필시 기억하기 때문이지

 

 


 

 

황형철 시인 / 4월 동백

–섬 3

 

 

청명을 앞뒀는데 이름도 무색하게 동백이 한창이다

 

큰넓궤에도 피고 너븐숭이에도 피고 빌레못굴에도 피고 섯알오름에도 피고 송령이골에도 피었다

 

바람 불어도 흔들리지 않게 파도 덮쳐도 꺼지지 않게 애지중지 겹겹으로 불씨 에워싸 금방이라도 타오르겠다는 듯 환하지만

 

삼촌이 건넨 식은 지슬 같아서 어멍이 잡아준 마지막 손길 같아서 누군가 머뭇거리다 몰래 내건 조등弔燈같아서

 

어쩌나 차마 고개 들 수 없다 바라볼 수 없다 만개한 숲으로 들 수가 없다

꽃이 지는 찰나에도 꽃을 붙들고 있는 그림자가 유난히 깊은 어둠 같기만 하여 붉게 뜨겁게 가슴이 타기만 하여 파리한 나무처럼 서서 한참을 울었다

 

 


 

황형철 시인

1975년 전북 진안 출생.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1999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의 당선, 계간 [시평]을 통해 등단. 현재 계간 『시와사람』 편집장과 광주전남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광주MBC에 재직하고 있다. 시집 <바람의 겨를> <사이도 좋게 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