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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고훈실 시인 / 내 리아스식 연애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13.

고훈실 시인 / 내 리아스식 연애

 

 

내게 깊숙이 파고 들어오는 걸 몰랐다

내향성 발톱처럼 욱신거리는

브라보콘 밑동처럼 위태로운

한 이미지 안의 낯선 침강

바닷물이 밀려들자 내 수평선이 잠겼다

더는 젖은 귀에 뭍이 차오르지 않는

나를 양식하기에 좋았다

바다를 두루마리로 말았다

심지 안에 식어버린 눈동자의 무덤이 가득했다

죽은 감각은 더는 발끝을 의심하지 않았다

파란은 파란을 끌어오고

패총 같은 연애의 용도를 폐기처분한 뒤

우린 자기 안의 껍데기에 자주 베였다

수면으로 들어온 산 능선을 지그재그로 물어뜯는

파도의 흰 이빨

제멋대로 나를 읽어버린 바다의 주름 진 난입

국지성 환통이 악천후처럼 밀려왔다

해안선이 깎일 때마다 우리의 환상은 분할되었다

은밀한 곡선들이 내장을 드러내고

자기 안으로 칼을 들이대는 그 순간까지도

 

 


 

 

고훈실 시인 / 론다의 소

 

 

가장 오래 죽은 소가 제일 맛있는 소가 된다

자기 생을 조준한 분노로 투우는 날뛴다

어미 소의 자궁을 떠나 무릎 꺽인 순간

평생을 따라 올 투창을 예견하며 첫 울음을

울었다 뿔을 갈고 이마를 다치고 씩씩거리며

싸움의 기술을 익혔다 론다의 절벽으로 계절이 오르내리고

자라는 만큼 겁도 커졌다 순한 눈으로 뒷걸음치면

불구의 신이 채찍을 갈겼다

죽을 수도 살 수도 없을 때* 소는 빨간 장식을

얹은 채 투우장에 들어선다 제일 유능한 투우사는

빨리 죽이는 자가 아니라 오래 죽이는 자

염통에 꽂힌 여러 개의 창이 소를 끌고 다닌다

소가 뿜는 고통이 투우장을 달구고

비틀거리다 벌떡 일어나는 죽음의 이음새

엔진 꺼진 차처럼 소가 쓰러진다

뒷문으로 도망 간 겁쟁이 소보다

훨씬 비싼 값에 싸움소는 팔려 나간다

오랜 고통이 그의 육질을 부드럽게 했다

오랜 분노가 다짐육처럼 그를 칼질했다

 

*김이율 책 제목에서 따옴

 

 


 

고훈실 시인

제주 출생. 2010년 월간 《시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시를 위한 알레그로』(2014) 공저와 『3과 4』(포엠포엠, 2017)이 있음. 모래톱 문학상,  독도 문학상 수상. 두레문학회원. 동서대 사회교육원에서 시창작 강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