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계헌 시인 / 그믐밤
가장 고요할 때 고요는 무기가 된다
한적한 골목 탱자나무 가시는 적막을 빨아들이며 촉수를 반짝인다 거듭되지 않는 순간을 침묵으로 봉인해버린 시간들 고요의 순도를 키우고 삭히며 바람의 파문을 예감하는 이들은 삶의 어떤 경계면에 닿을 수 있을까
깊은 산중 까마득한 절벽을 보라 말없음의 높이에 달빛 한 칸 들여 이토록 숨찬 급류의 사랑을 내치는 것을 숱한 목숨들이 찌르고 숨 허덕이는 지상의 날들에서 한 구비 고요를 만난다는 건 석류의 주홍빛 잇몸에 가 박히는 가을의 잔광 같은 것
대지는 낮고 숲의 우물은 깊어 조금씩 고요 속에 마른 몸을 벗어두고 사람들은 늙어갔다 때로는 자기모순에 밟혀 흐느적이는 내연의 지느러미들 어디서부터 와서 수면을 흔드는 이 적막을 달빛으로 뜯어내는 그믐밤의 완강함이여
송계헌 시인 / 목각 인형(木刻 人形)
소리 없는 말들이 가슴팍에 흐르고 흘러 그는 반편의 이름이 된다 이미 소진되었거나 너무 많은 침묵이 허공으로 사라진 뒤……
그가 단단한 어깨를 이루게 된 것은 오랜 시간 바람과 고열과 빗방울을 입으면서부터이리라 나무를 닮아가듯이 하얗고 매끄러운 살성과 모성을 지닌 생명체 본연의……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큰 눈이 수심 깊은 샘물을 끌어안으면서부터이리라 어린 나무에게 입김을 고루 주었을 때 물푸레나무가 푸르름을 넓혀 간 것처럼
햇빛의 씨줄을 걸어 서느런 눈매를 조각하던 사람들아 한 시절 꽃으로 맺히고 떨군 날들 기다려왔으나 질박한 천 한 조각 굽은 몸 감싸 안지도 못한 게냐 낙타의 궁핍이 흐르고 흘렀으나 샤콘 낮은 음계를 여는 귀는 푸르렀다 미완의 경계를 허물지 않으며 눈부신 칼끝 붉은 꽃을 피울 수도 있었는데 그대에게 도달할 수 있는 유일의 길 울음소리 굵어진 형제들 서넛 친구들 세월 바람에 얽히고 휘어진들 불평을 넘어선 자들아 먼지와 찬 공기가 한 몸임을 몽당 나무로 고요히 생의 비의 품고 있음을
축제의 밤은 기울고 희끗한 속눈썹을 열고 닫으며
꼭 그대 모습으로 형상 지어질 때까지 깎고 또 깎는
그 후로도 오래……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훈실 시인 / 내 리아스식 연애 외 1편 (0) | 2023.02.13 |
---|---|
이우디 시인 / 노트북* 외 1편 (0) | 2023.02.13 |
이은수 시인 / 익선동 골목 (0) | 2023.02.13 |
김정경 시인 / 달의 교습소 외 1편 (0) | 2023.02.12 |
고두현 시인 / 지상에서 천국까지 외 1편 (0) | 2023.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