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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송계헌 시인 / 그믐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13.

송계헌 시인 / 그믐밤

 

 

가장 고요할 때

고요는 무기가 된다

 

한적한 골목 탱자나무 가시는 적막을 빨아들이며 촉수를 반짝인다

거듭되지 않는 순간을 침묵으로 봉인해버린 시간들

고요의 순도를 키우고 삭히며 바람의 파문을 예감하는 이들은

삶의 어떤 경계면에 닿을 수 있을까

 

깊은 산중 까마득한 절벽을 보라

말없음의 높이에 달빛 한 칸 들여

이토록 숨찬 급류의 사랑을 내치는 것을

숱한 목숨들이 찌르고 숨 허덕이는 지상의 날들에서

한 구비 고요를 만난다는 건

석류의 주홍빛 잇몸에 가 박히는 가을의 잔광 같은 것

 

대지는 낮고 숲의 우물은 깊어

조금씩 고요 속에 마른 몸을 벗어두고 사람들은 늙어갔다

때로는 자기모순에 밟혀 흐느적이는 내연의 지느러미들

어디서부터 와서 수면을 흔드는 이 적막을

달빛으로 뜯어내는 그믐밤의 완강함이여

 

 


 

 

송계헌 시인 / 목각 인형(木刻 人形)

 

 

소리 없는 말들이 가슴팍에 흐르고 흘러 그는 반편의 이름이 된다

이미 소진되었거나 너무 많은 침묵이 허공으로 사라진 뒤……

 

그가 단단한 어깨를 이루게 된 것은 오랜 시간 바람과 고열과 빗방울을 입으면서부터이리라

나무를 닮아가듯이

하얗고 매끄러운 살성과 모성을 지닌 생명체 본연의……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큰 눈이 수심 깊은 샘물을 끌어안으면서부터이리라

어린 나무에게 입김을 고루 주었을 때 물푸레나무가 푸르름을 넓혀 간 것처럼

 

햇빛의 씨줄을 걸어 서느런 눈매를 조각하던 사람들아

한 시절 꽃으로 맺히고 떨군 날들 기다려왔으나 질박한 천 한 조각 굽은 몸 감싸 안지도 못한 게냐

낙타의 궁핍이 흐르고 흘렀으나 샤콘 낮은 음계를 여는 귀는 푸르렀다

미완의 경계를 허물지 않으며

눈부신 칼끝 붉은 꽃을 피울 수도 있었는데

그대에게 도달할 수 있는 유일의 길

울음소리 굵어진 형제들 서넛 친구들 세월 바람에 얽히고 휘어진들

불평을 넘어선 자들아

먼지와 찬 공기가 한 몸임을

몽당 나무로 고요히 생의 비의 품고 있음을

 

축제의 밤은 기울고

희끗한 속눈썹을 열고 닫으며

 

꼭 그대 모습으로 형상 지어질 때까지

깎고 또 깎는

 

그 후로도 오래……

 

 


 

송계헌 시인

대전에서 출생. 공주 교대, 한남대 사회문화 대학원 문학예술학과 졸업. 1989년도 《심상》誌로 등단. 시집으로 『모서리 슬픈 추억을 갖고 싶지 않다』 『붉다 앞에 서다』 『하루의 정전』 등이 있음. 제 9회 대전 시인 협회상 수상. 2020년 대전 문화재단창작지원금 수혜. 현재 대전 충남 작가회, 심상 시인회 회원. <새여울> 문학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