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경 시인 / 달의 교습소
가매 아름다운 매화라는 뜻이라지요 꽃 이름은커녕 이름자도 쓸 줄 모르시는 할머니 경임아 세라야 남진아 숙자야 딸과 손녀들 출석 다 부른 다음에서야 내 이름 찾아주시고요 전화기 옆 벽에 그려진 번호들 문자가 생겨나기 전 동굴벽화와 닮았지요 닳고 작아져 꾸벅꾸벅 땅으로 자라는 할머니를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받아 적는 밤 감잎 사이 지나는 바람 소리 책갈피로 꽂아놓았죠 잠결에 문틈으로 내다보면 옷에 꽃 그림 그릴까 봐 저녁 거르신 할머니 수돗가에 기저귀 풀어놓고 오늘은 네 아비 낳던 날도 기억난다, 하시고요 흰 엉덩이에는 덥석 깨문 달빛 자국 하품하는 달의 귀가 발그레한 이유 나는 낙서로 빽빽한 공책을 덮어요
김정경 시인 / 미륵사 뽕짝뽕짝
보라는 백제 유적은 안 보고 엄마들만 구경했다 현장학습 나온 아이들처럼 줄 맞추어 풀풀 먼지 날리게 푸른 풀 뽑는다 한 발 전진할 때마다 자루에 강아지풀, 마디풀, 쇠무릎, 비단풀 넘칠 듯 넘칠 듯 봄볕도 차란차란 느티나무 밑 라디오는 산다는 게 다 그런 거지 누구나 빈손으로 와 소설 같은 한 편의 얘기들을 세상에 뿌리며 살지 엉덩이춤 부추기는데 미륵사로 돌 나르던 아빠들은 다 어디에 있나 딴딴하던 장딴지와 힘줄 팽팽하던 팔뚝 그때 그들의 허리 받쳐준 목소리는 누구의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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