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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정경 시인 / 달의 교습소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12.

김정경 시인 / 달의 교습소

 

가매

아름다운 매화라는 뜻이라지요

꽃 이름은커녕 이름자도 쓸 줄

모르시는 할머니

경임아 세라야 남진아 숙자야

딸과 손녀들 출석 다 부른 다음에서야

내 이름 찾아주시고요

전화기 옆 벽에 그려진 번호들

문자가 생겨나기 전 동굴벽화와 닮았지요

닳고 작아져

꾸벅꾸벅 땅으로 자라는 할머니를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받아 적는 밤

감잎 사이 지나는 바람 소리

책갈피로 꽂아놓았죠

잠결에 문틈으로 내다보면

옷에 꽃 그림 그릴까 봐

저녁 거르신 할머니

수돗가에 기저귀 풀어놓고

오늘은 네 아비 낳던 날도 기억난다,

하시고요

흰 엉덩이에는 덥석 깨문 달빛 자국

하품하는 달의 귀가 발그레한 이유

나는 낙서로 빽빽한 공책을 덮어요

 

 


 

 

김정경 시인 / 미륵사 뽕짝뽕짝

 

보라는 백제 유적은 안 보고

엄마들만 구경했다

현장학습 나온 아이들처럼 줄 맞추어

풀풀 먼지 날리게

푸른 풀 뽑는다

한 발 전진할 때마다 자루에

강아지풀, 마디풀, 쇠무릎, 비단풀

넘칠 듯 넘칠 듯 봄볕도 차란차란

느티나무 밑 라디오는

산다는 게 다 그런 거지

누구나 빈손으로 와

소설 같은 한 편의 얘기들을

세상에 뿌리며 살지

엉덩이춤 부추기는데

미륵사로 돌 나르던 아빠들은

다 어디에 있나

딴딴하던 장딴지와 힘줄 팽팽하던 팔뚝

그때 그들의 허리 받쳐준 목소리는 누구의 것이었을까

 

 


 

김정경 시인(하동)

경남 하동 출생. 원광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 2013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 전북작가회의 회원. 현재 전주MBC 라디오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