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학주 시인 / 사려니숲길을 가는
그 마음 다칠까 되부르지 못한 일이 사실은 단둘뿐인 먼길을 간 것인지
야윈 눈청에 빗금을 다는 저녁은 눈이 어는 길만 밟듯이 오고 사랑은 무엇과도 달라야 한다 이런 생각은 노루 혓바닥 같은 야생을 핥고 혀를 깨무는 소리를 돌아나오는 거기도 하지만
사랑은 살려달라고 하는 일 아니겠나 이젠 전화도 가지 않는 옛날에게 사려니숲길을 걷게 하는 건 아니지
막 숲을 벗어났다 돌아오는 메아리가 때죽나무 하나를 두르고 성냥불을 쬐며 쿨럭이는 뽀얀 영혼을 덧입는다
죽을 거 같은 채로 시작된 그런 그 사랑 지나갔나 싶은 길은 끝까지 촛농이 떨어진 얼굴색이라 여기고마네
뽀삭뽀삭 눈에 밟히는 그 사람 오지 못한 길에서 그 한사람, 마주치는 일
눈밭 한쪽에 볕이 들어 놀라고만 서 있는 쓸모없어 사랑은 신비롭다 우산도 없는 나
황학주 시인 / 비오는 날, 희망을 탓했다 비바람에 벚꽃 질 때 어디에서 어디로 가든 이름을 알 수 없는 죄스러운 희망이 있는 거라는 생각을 했다 이쪽에서 저쪽까지 걸레를 밀며 비가 들이친 마루를 닦으며 희망에게 절망이라는 유일한 선생이 있는 듯도 하여 먼 훗날 벚나무 교정을 떠나 살 때도 벌로 청소를 시키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곤 할까 생각했다 교실에 남은 나를 잊어버리고 비가 내리던 하루,라는 말이 가장자리 없이 춥던 날 용서를 청하지만 용서받을 사람은 없고 모든 것을 놔둔 채 나만 탓할 수도 없는 매 순간 좀체 밝아지지 않는 그런 희망 속에 매 순간 좀체 어두워지지 않는 그런 희망이 있었다 -시집 『사랑할 때와 죽을 때』, 창비, 20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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