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연우 시인 / 캐리커처
귀걸이는 그려 넣지 마세요
축제장의 한 코너에 나도 국화처럼 앉았다
당신이 보지 않을 때 나는 봉오리였다가 당신이 바라볼 때 나는 노랗게 폈다
마주 보는 당신이 웃었다 마주 보는 나도 웃었다 우리는 서로 모르는 사이 서로를 바라보는 심장이 재빨리 흔들렸다
대기실 TV에 나온 배우 같이 서로 다르게 흐르는 공간의 공명 속에서 나는 당신에게서 나를 보고 당신은 내게서 당신을 봤다
우리는 어떤 얼굴로 마주하게 될까요
같은 곳에 있어도 같은 곳을 보지 않는 내가 보는 나와 당신이 보는 나 이미 정해져 있을지도 모를 당신을 뺀 우리는 상상한 것과 닮은 모습을 기다렸다
익숙한 것에 익숙해진 흉내 꾸며진 문답의 답답함이 기지개를 켰다 눈코입이 잘 웃고 있는 그림 속 윤곽 모든 게 드러나는 공모의 순간
우리, 이제 놀라야 합니까
바로 보면 당신 거꾸로 보면 나 당신이 보면 나 내가 볼 땐 당신 인파 속에서 짐작으로 번역 가능한 해답 나는 겉으로 웃고 당신은 속으로 웃고 있었다
서연우 시인 / 보이드 스페이스*
여보세요? 여기 아무도 없어요?
북쪽을 지키는 거북과 남쪽을 지키는 해태와 화마를 쫓는 드므와 지나가면 늙지 않는다는 불로문이 있다 넘볼 수 없는 담이다 하지만 백 년이 넘도록 창덕궁은 빈집이다 나는 삼천 원으로 열리는 돈화문을 나왔다
기하학적 입방체들이 상호 결합한 잿빛 전벽돌과 연리지 된 담쟁이덩굴이 나를 유혹한다 노란 철문을 노크하고 있는 플라타너스를 밀쳤다 은행잎이 새치기하는 내 발등을 문다 철조망 베레모를 쓴 고려 시대 삼층석탑 오래 운 흔적을 본다 지금 공간 스페이스**도 빈집이다
몸이 무거워진 비둘기에게서 평화가 사라졌다
우뚝 솟은 집 집 집 관심 없는 사람 사람 사람 그 사이 사이 사이에 바람이 모래 휴이대첩전 전술을 펼친다 벗어나지 못하는 경계를 가진 나도 빈집, 심판 없는 지구도 곧 빈집이 될 것이다
신음하던 담쟁이 잎이 떨어진다 살아 있는 것들이 사라지고 있다
* 無의 공간. 우주에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지름 10억 광년의 공간 ** 김수근이 설계한 우리나라 현대건축의 대표적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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