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 시인 / 음파
해가 우짖는 파동이 물속을 치밀게 하여 물 위에 거대한 나비가 떴다
물의 포만감이 불러낸 해와 달의 악취여
냄새의 빛기둥 위에서 누군가 죽은 별을 센다
물위에 뜬 숫자들이 거대한 나비의 행렬로 번지는데, 어찌하여 이런가 손에 붙들린, 피에 번져 멀리서 이 몸을 적신, 이 하얀 손은 누구 것인가
누구의 입을 막아 노래는 노을에 찢긴 물빛이 되는가
이마를 누르는 나비의 날개 물결 안에서 녹아 펄럭이는 해
누구의 배내옷 자락인가
강정 시인 / 오래된 그림이 있는 텅 빈 식탁
벽에 걸린 그림 속에 둥글게 흰 다리가 있고 그 위를 걷다가 문득 우산을 펼쳐 드는 사내 하나 반대편 벽 깊숙이 향해 있는 숲길을 되짚어 사내에게로 다가오는 여자 하나 바라보는 시간이 오래될수록 사람은 마치 길 위에 길게 두러누운 죽은 나무 같고 부러진 등걸 주위에 핀 버섯들이 사람처럼 보일 때 우리는 오래 떠들던 입을 다물고 혀끝에서 소리 없이 지워진 단어들을 식도 깊숙이 감추며 진짜 서로가 생각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동공을 텅 비운 채 사심 없는 짐승처럼 열어 보이는 것이었다
벽에 걸린 그림 속에 당신을 보는 내가 둥글게 흰다리 위를 서성이고 창밖 태양과는 상반된 표정으로 비는 그림 위에 얼룩을 남기고 얼룩 속을 한참 바라보던 당신은 내가 어느덧 다리를 다 건너 당신이 걸어 나온 숲길 안쪽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바람속에 띄운 미소처럼 여기는 듯하지만 오래지 않아 비는 그치고 우산을 고이 접어 젓가락처럼 숲길을 콕콕 찍으며 내 그림자를 시작하는 당신은 조만간 버섯들의 먹이가 될 터, 정작 그림 바깥으로 사라진 건 내가 아니고 그렇다고 당신도 아니었다
그림 바깥으로 나오니 다시 햇빛, 다섯 시간 동안 내리지 않는 비 어전히 주린 눈빛의 앳되고 착한 짐승 두 마리 만발하는 버섯의 차가운 毒!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진희 시인 / 느린 슬픔 외 1편 (0) | 2023.02.15 |
---|---|
김정웅 시인(서울) / 패배자의 여름 외 1편 (0) | 2023.02.15 |
금은돌 시인 / 유령 칸타타 외 1편 (0) | 2023.02.15 |
서연우 시인 / 캐리커처 외 1편 (0) | 2023.02.15 |
리호 시인 / 다리 세 개 달린 탁자 외 1편 (0) | 2023.02.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