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웅 시인(서울) / 패배자의 여름
비키니를 입은 여자애들이 차도를 건넌다 곧 끊어질 것만 같은 한 줄 끈이 거리의 모든 시선을 팽팽하게 묶고 있다 이 모든 비극이 바다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리 없는 여자애들은 어젯밤 시체가 떠올랐던 해변에서 얼굴을 씻고, 젖가슴을 적시고 물장난을 치며 슬쩍, 가랑이를 만질 것이다
다리를 바다에 놓아준 저녁이 기어 오고 맨 영혼이 드러나도록 몇 번의 몸뚱이를 벗어 봐도 소년이 될 수 없는 사내들이 여자애들을 뒤따라간다 바다 태생의 저 야만스러운 어둠, 손발이 뒤로 묶인 채, 하나 둘 수면으로 떠오르는 음악들은 저질러진 그 어떤 추억으로도 재생할 수 없는 그 여름의 비극이었다
몇 달 후에 바다로 간 한 여자애는 중절수술을 받을 것이다 어젯밤 해변에서 떠오른 그 여자처럼, 몇 년 후에 한 여자애는 다시 바다로 돌아올 것이다 그 여자가 그랬던 것처럼, 문명 밖의 예감이 모조리 비껴간 후에도 언제든 소나기는 쏟아졌다 처마가 없는 우리의 생, 빗소리와 가냘픈 손목이 뒤틀리는 소리를 분간할 수 없는 밤이다
김정웅 시인(서울) / 개와 새의 끼니를 챙기는 저녁
자주 개새끼라 불리는 사람들은, 통상적으로 마음에 개와 새를 함께 기르는 사람이다 뭐, 그런 개새끼가 다 있냐는 누군가의 외침에 송곳니 먼저 드러내고야 마는 개나 멀리 날아가 버리는 새, 그래! 이 개새끼야! 말끝마다 붙은 새끼들을 끝내 뿌리치지 못한 채 사람다움으로부터 한참을 달아난 것들이 저녁만 되면 모이는 곳, 어쩌면 나의 전생은 함부로 버려진 것들의 어미였을까 너희들은 가난이 습성이 되도록, 마치 노숙이 직업인 것처럼 살았겠구나 그러므로 나는 바닥에 바싹 엎드린 것들이 잘 맡을 수 있도록 낮고, 무겁게, 밥 짓는 냄새를 피운다 얻어터져 가면서도 바닥에 흩어진 밥알을 주워 먹는 일, 그렇게 밥을 먹다가 차에 치여 다시 내장이 흩어지는 일, ‘생활’이란 사람이라면, 사람새끼라면 다시 몇 번이든 주워 담을 수 있는 것, 그러나 비록 그릇이 없더라도 좋으리라 우리는 밥공기처럼 둥그런 어둠이 엎질러진 지구의 찬밥, 그래! 이 개새끼들아! 말끝마다 붙은 새끼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끼니를 때우는 저녁, 아마 지구 반대편까지 퍼졌을 것이다 밥 짓는 냄새가 아픈 다리를 끌고 집으로 돌아오는 세상 모든, 버림받은 것들의 어미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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