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평 시인 / 꽃돌 연가
돌 속에 꽃이 피어 있어요 오래 전, 꽃들은 어떻게 저 단단한 돌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을까요
매화석, 국화석, 장미석, 목련석, 해바라기석… 꽃의 아름다움에 반한 돌들이 제 가슴 열어주었다면 꽃의 향기에 숨넘어간 돌들이 제 사랑 열어주었다면
그래요, 꽃잎 떨어지는 게 서러워서 향기 사라지는 게 아쉬워서 차라리 그대로 꽃돌이 되고 말았을 거예요
보세요, 돌 속에서 향기가 나요 꽃이 돌 속으로 들어갈 때 간직한 향기 사랑으로 만개했던 그 기쁨의 향기가 나요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당신도 이제 꽃돌이 될 거예요 돌 같은 당신의 가슴이 사랑으로 열리는 순간에 영원한 빛깔과 향기를 지닌 꽃돌이 될 거예요
돌보다 강한 아름다움, 돌보다 오래 남을 향기를 머금고 사랑뿐인 가슴, 사랑뿐인 기쁨에 안겨 이제는 영원히 화사하게 피어 있을 거예요 꽃돌처럼 꽃돌처럼
이인평 시인 / 고요의 사원
나는 고요의 사원에서 시를 쓰네
내 시혼이 살아 있기에, 오래 전 언어들이 나를 세상으로부터 떼어 놓았지
시가 한 걸음씩 내게로 다가올 때마다 나는 두근거려
끝내 내 존재를 들켜 버리고 말 것 같은 긴장에 사로잡히곤 하지
나는 시혼을 감추려고 향기를 내뿜지 내 언어들이 때때로 나를 따돌려 갈만 한 거리에서 나는 고개를 돌리지
내 시들은 거기에서 살아 사원을 지나는 사람들을 멈추게 하고 나도 그들도 돌아설 수 없을 만큼의 향기를 뿜어 생을 위로하지
이인평 시인 / 천사의 꿈
오월 어느 날, 꿈속에서, 한 천사가 있었던 곳은 영원한 아름다움이 끝없이 펼쳐진 풍경, 그 황홀한 빛 가운데 자리 잡은 궁궐이었네. 천사는 눈부신 빛을 두르고 있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네.
신비한 빛 가운데 계신 하느님께서 천사에게 말했네. “애야, 너는 이 저울을 가지고 세상으로 가거라” 하시며 천사에게 매우 간단한 저울 하나를 건네주고 나서 다시 말했네. “무엇을 다는 저울인지 알겠느냐?… 너는 그 저울로 세상 사람들 마음을 달아 보거라. 그 저울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사랑과 미움의 무게를 네게 알려 줄 것이다.” 담담한 표정으로 듣고 있는 천사를 보며, 하느님께서 또 말했네. “네가 직접 달아 보면 알겠지만, 그 저울은 사람들의 마음에 있는 사랑과 미움의 무게에 따라 바늘이 좌우로 기울게 될 것이다. 사랑이 담긴 사람의 마음은 오른쪽으로, 미움이 담겨 있는 사람은 바늘이 왼쪽으로 기울 것이다. 자, 이제 너는 세상으로 가서 사람들의 마음을 달아 보거라. 마음의 무게가 미움으로 기울어진 자들은 지옥으로 보내고, 좌우로 전혀 기울지 않는 자들은 연옥으로, 그리고 마음이 사랑으로 차오른 이들은 천국으로 데려오도록 하여라.” 하느님의 말씀을 다 들은 천사는 고개 숙여 인사를 드린 다음 빛나는 날개를 저어 지상으로 내려갔네.
지상은 아직 밤이었고 별빛들은 천사의 날개처럼 반짝이고 있었네. 천사는 고통에 지쳐 잠든 사람들을 바라보았네. 사람들은 사랑과 미움의 갈등 속에서 살고 있었네. 천사는 하느님께서 주신 저울을 가슴에 안고 가만히 사람들을 살펴보았네. 어떤 자들은 자신의 운명도 모른 채 마구 욕심을 부리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온 마음을 쏟아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기도 하였네. 풀잎보다 먼저 시드는 명예에 눈먼 자들도 있었고, 고집스런 짐승처럼 탐욕의 노예가 된 어리석은 자들도 있었네. 그러나 세상의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지혜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네. 그들은 모든 일을 하느님의 자비 안에서 이루고 있었으며, 자신들의 고난을 기쁘게 인내하고 있었네. 그들은 또 은총과 깨달음의 경지, 즉 하느님의 뜻을 따름과 동시에 항상 모든 걸 이해하며 받아들이는 마음과 언제나 자신의 모든 걸 거리낌 없이 내주는 사랑으로 행복을 누리고 있었네. 어디에서 사는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네.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고난의 길을 가고 있었지만,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어느 곳에서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웠네.
사람들의 여러 모습을 살펴보던 천사는 드디어 한 사내의 마음을 저울에 달아보기로 했네. 천사가 처음으로 저울에 달아보려는 사내는 아내와 세 자녀를 거느리고 사는 불혹의 시인이었네. 사내는 가진 것 없는 가난한 시인이었지만, 항상 하느님을 공경하며 살고 있는 사람이었네. 겉으로 보기에는 세상을 떠도는 나그네 같았지만, 그 역시 자신의 죄와 고통을 짊어지고, 가족과 함께 세상의 길을 힘겹게 걷고 있는 사람이었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천사가 혼잣말을 하였네. “사실 인간의 마음에 담겨 있는 사랑과 미움을 달아본다는 것은 얼마나 진지하고 중대한 일인가! 그러나 인간의 비참을 보는 것은 또 얼마나 애처로운 일인가! 인간의 삶은 때로 흥겹기도 하고 감동적이기도 하지만, 참으로 인간의 여정은 고통 속을 흐르고 있었구나!” 하고 탄식하였네.
그런 다음 천사는 그 사내의 마음을 저울에 달기 시작했네. 그 순간이었네, 천사가 그의 마음을 막 저울에 달려고 하는 순간, 천사는 깜짝 놀라 뒤로 넘어질 뻔했네. 천사가 저울에 달려고 했던 그 사내는 바로, 천사의 꿈 밖에서 살고 있었던 자기 자신이었네. 천사가 그 사내의 마음을 저울에 다는 순간, 동시에 천사 자신의 마음이 저울에 달리는 것 아닌가! 천사 역시 지금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감쪽같이 잊고 있었네. 자신을 먼저 달아야 하는 꿈속에서 놀란 천사가 “오, 하느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며 그 사내를 보는 순간, 지상의 어둠 위로 아침 해가 떠올랐네. 맑은 햇살에 영혼이 깨이는 아침이었네. 꿈속의 천사가 떠나간 끝없이 푸른 오월의 길로 장미꽃 향기가 흐르고 있었네.
어느 날… 꿈속에서… 나는 천사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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