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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진희 시인 / 느린 슬픔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15.

이진희 시인 / 느린 슬픔

 

 

추락하는 몸을

목련나무 가지들이 차례대로 받아주었다지

 

라일락 향기 또한 어리고 보드라운 너를 휘감아

네가 더욱 무사했으리라는 상상, 다행이다

 

주홍빛이 덧대진 푸른 하늘과 흰 구름

깜박 다른 생의 부숭한 화단에 오목하게 등 대고 누웠다가

별다른 상처 없이 툭툭 털고 일어선 너

 

셔터부터 내려지는 감정에 대해 얘기하는 동안

찻집 유리문 너머 지나치는 아무 행인들 속에

네가 있고 내가 있고 그렇다 우리들이

 

크게 넘어져도 곧장 울지 않는

나중도 아주 나중 혼자일 때에야 헤아려보는 아픔

하나같이 우리는 넘치거나 모자라는 존재

 

아끼는 물건이 저마다 다르듯

슬픔의 차가운 물결에 뒤늦게 울컥 작은 손을 담그고

여러 겹 어두운 커튼을 걷지 않는 너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충분히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사랑을 믿는

 

 


 

 

이진희 시인 / 적과 친구

 

 

마법의 두꺼비가 피 묻은 단도를 물고는

펑, 하고 사라져 버리길

 

저의 죽음이 예고된 봉인 편지를

제 발로 신속하게 전달하게 하는 일

증오에서 뽑아낸 피의 잔을 어처구니없이 엎지르고 나서

훔친 보석을 선물하곤 답례를 기다리는 일

 

한손으로는 유리공처럼 텅 빈 구원을

나머지 손으로는 돌멩이 같은 단단한 파멸을 바라면서도

기도의 내용을 감추는 일

그를 위해 기도했다고만 알리는 일

 

서리 낀 창가에 서서

봄이 막 도착한 정원을 파헤치라고 명령하는 일

 

스스로 고통스러워하는 당신을 모욕하고는

그걸 견디는 당신이라야만 사랑하겠다고

맹세하는 일

 

 


 

이진희 시인

1972년 제주 중문에서 출생. 한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同 대학원 졸업. 2006년 《문학수첩》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실비아 수수께끼』(삶창, 2014), 『페이크』가 있음. 제13회 오장환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