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곽효환 시인 / 그해 겨울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14.

곽효환 시인 / 그해 겨울

 

​한 사람이 가고 내내 몸이 아팠다

겨울은 그렇게 왔다

가지 끝에서부터 몸통까지

여윈 나뭇가지가 흔들릴 때마다

마른기침은 시든 몸 폐부 깊은 곳을 찔렀다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오는

좀체 가시지 않는 통증,

나는 미련을 놓지 않았고

나는 내내 기다렸으나

그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모두들 잠든 새벽 네 시,

혼자 남은 빈 병실 창밖으로

띄엄띄엄 깊은 겨울밤을 가로지르는

자동차 전조등을 보며

아직 꺼지지 않은 불빛을 헤아렸다

그 겨울은 혹한도 폭설도 없었지만

오랫동안 물러설 줄 몰랐다

어림할 수 없는 그 끝을

견딜 수 없어, 더는 견딜 수 없어

마음을 먼저 보냈으나

봄도, 그도……

그렇게 겨울은

더 깊어지거나 기울었다

-『슬픔의 뼈대』 문학과 지성사, 2014.

 

 


 

 

곽효환 시인 / 아버지의 사진첩

 

 

삼십 주기 기일을 며칠 앞두고 낡고 해진 아버지의 사진첩을 편다

그곳의 빛바랜 시간은 더디게 가기도 하고 멈추기도 하며

때론 흐트러진 사진들 틈새로 기억의 문이 열린다

 

동구에는 등 굽은 늙은 느티나무와

초여름 하얀 포도송이 같은 꽃을 피우는

키 큰 오동나무, 그 너머 멀지 않은 곳에 철길이 있다

기차는 하루에 한 번 혹은 두 번 지나가고

철둑 따라 나란한 신작로에는 꽃들이 계절을 바꾸어 피었다 지는데

너무도 오래 닫혀 있던 흑백사진들이

세월의 기억을 따라 아주 천천히 흘러간다

외아들을 먼저 보내고 이십여 년 넘게 한숨 속에 더 살다 간

초로의 조부모, 처녀티를 미처 벗지 못한 새댁

어머니와 숙수그레한 고모들, 아직 사내인지 계집아이인지

구분할 수 없는 나와 어린 누이, 아픈 갓난아이를 안고

길을 막아 전주행 직행버스를 세운 콧수염 기른 아버지

읍내엔 새마을운동 땐가 초가지붕 뜯어내고 얹은

슬레이트아래 검고 붉은 간판 글씨의 구거리잡화와 학성이발관

구거리잡화는 구거리수퍼가 되고, 수퍼집 딸은

시집가 아이 엄마가 되고, 솜리 모자집 아들은

서울로 유학을 가고,

아들 학성이가 어느새 며느리를 들였어도

그래도 증손을 볼 때까진 끄떡없다며

팽팽히 가죽끈 잡아당겨 면도칼을 다듬는 이발관 할아버지

그림자같이 달라붙어 떨어질 것 같지 않던

사람들, 그 풍경들

 

이제 낡은 사진첩도 점점 누렇게 얼굴을 흐리고

접착면의 끈기도 무뎌져 시간을 가두어두었던 손을 자꾸 놓아

얼마 더 지나면 아스라이 잡은 기억의 끈도 영영 놓겠지만

시간이 그림이 되어 멈추는 그곳에서 느리게

게 살았으면,

다시 그렇게

 

 


 

곽효환(郭孝桓) 시인

1967년 전북 전주에서 출생. 건국대학교 국문과 졸업. 고려대학교 대학원 문학박사. 1996년 《세계일보》에 〈벽화 속의 고양이 3〉와, 2002년 『시평』에 〈수락산〉외 5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 『인디오 여인』 『지도에 없는 집』 『슬픔의 뼈대』 『너는』 등과  그밖의 저서로는 『한국 근대시의 북방의식』 『너는 내게 너무 깊이 들어왔다』 등과  편저 『이용악 시선』 『구보 박태원이 시와 시론』 『아버지, 그리운 당신』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이용악 전집』(공편) 등이 있음. 고대문학상, 애지문학상, 편운문학상 등 수상. 현재 대산문화재단 재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