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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익진 시인 / 인간의 굴레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14.

정익진 시인 / 인간의 굴레

 

 

1.

 잠시 벗어났다. 크게 벗어나진 않았어도

 

 예상 가능한 풍경의 연속에서

 예상 가능한 사건의 일련 속에서

 예상 가능한 만남의 지속과 지리멸렬로부터

 

 어쩌면, 주변 세력의 온갖 올가미로부터 벗어날 수 없으리라는 예감,

 

 여름날 오후 4시,

 한적한 도심 공원의 벤치에 앉아 있다.

 

 키 큰 나무의 나뭇가지와 나뭇잎 사이로 쓸모도 없이

 반짝이는 햇살이 눈부시지만,

 삶이란 게 저렇게 찬란하지는 않을 텐데,

 그리하여 허무한 구름 한 벌 걸친 채 여정을 마감할 것이라는 불길함

 

 노인 둘이 공원 산책길 위로 등장했다가 북문으로 퇴장한다.

 

 예상 불가능한 순간들, 푸른 안개 속으로 사라진 왕국을 찾아 헤맨다든지,

 별과 별 사이를 달리는 삶을 지속할 수 없으리라는, 이, 지독한, 안절부절

 

 차량들 지나치는 소리가 나의 소외감을 더욱 부추긴다.

 무엇으로부터 벗어나 어디로 향해 가겠다고 이 쌩난리부르스인가

 

2.

 말다툼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귀를 기울인다.

 하지만 때는 늦었다.

 몇 마디 주고받지 않았는데 벌써 서리가 내린다.

 급행이다. 빙판이 갈라진다. 위험수위 최상급, 느낌이 온다.

 

 20층 베란다 밖으로 떨어질 거라는 말과

 행복하지 않다는, 한순간도 행복해 본 적이 없다는 말소리가 들려온다.

 그들의 채찍에 휘둘린 나는 바로 저 앞이 낭떠러지일지라도 달려가야 한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들 말한다.

 

* 서머셋 모옴, 인간의 굴레(Of Human Bondage)에서

 

웹진 『문장』 2022년 11월호 발표

 

 


 

정익진 시인

1957년 부산에서 출생. 1997년 《시와 사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구멍의 크기』,『윗몸일으키기』, 『낙타 코끼리 얼룩말』, 『스캣』이 있음. 2014년 제14회 부산작가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