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익진 시인 / 인간의 굴레
1. 잠시 벗어났다. 크게 벗어나진 않았어도
예상 가능한 풍경의 연속에서 예상 가능한 사건의 일련 속에서 예상 가능한 만남의 지속과 지리멸렬로부터
어쩌면, 주변 세력의 온갖 올가미로부터 벗어날 수 없으리라는 예감,
여름날 오후 4시, 한적한 도심 공원의 벤치에 앉아 있다.
키 큰 나무의 나뭇가지와 나뭇잎 사이로 쓸모도 없이 반짝이는 햇살이 눈부시지만, 삶이란 게 저렇게 찬란하지는 않을 텐데, 그리하여 허무한 구름 한 벌 걸친 채 여정을 마감할 것이라는 불길함
노인 둘이 공원 산책길 위로 등장했다가 북문으로 퇴장한다.
예상 불가능한 순간들, 푸른 안개 속으로 사라진 왕국을 찾아 헤맨다든지, 별과 별 사이를 달리는 삶을 지속할 수 없으리라는, 이, 지독한, 안절부절
차량들 지나치는 소리가 나의 소외감을 더욱 부추긴다. 무엇으로부터 벗어나 어디로 향해 가겠다고 이 쌩난리부르스인가
2. 말다툼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귀를 기울인다. 하지만 때는 늦었다. 몇 마디 주고받지 않았는데 벌써 서리가 내린다. 급행이다. 빙판이 갈라진다. 위험수위 최상급, 느낌이 온다.
20층 베란다 밖으로 떨어질 거라는 말과 행복하지 않다는, 한순간도 행복해 본 적이 없다는 말소리가 들려온다. 그들의 채찍에 휘둘린 나는 바로 저 앞이 낭떠러지일지라도 달려가야 한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들 말한다.
* 서머셋 모옴, 인간의 굴레(Of Human Bondage)에서
웹진 『문장』 2022년 11월호 발표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리호 시인 / 다리 세 개 달린 탁자 외 1편 (0) | 2023.02.14 |
---|---|
황학주 시인 / 사려니숲길을 가는 외 1편 (0) | 2023.02.14 |
곽효환 시인 / 그해 겨울 외 1편 (0) | 2023.02.14 |
정용기 시인 / 오십견 (0) | 2023.02.14 |
이제인 시인 / 과외 선생 외 1편 (0) | 2023.02.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