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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돈형 시인 / 눈 외 9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16.

이돈형 시인 / 눈

 

 

 눈이 사람처럼 왔다

 

 손바닥에 닿자 이내 녹아 버려 손바닥을 한동안 내놨다

 

 지나온 맘을 데우는 것보다 허공에 내놓은 손바닥이 차가워지는 일이 더디다

 

 나를 끌어안던 사람

 나를 밀쳐내던 사람

 나를 질책하던 사람

 나를 죽여주던 사람

 

 사람, 사람, 사람, 사람, 사람, 사람, 사람, 사람

 

 눈이 사람처럼 오고 내민 손이 좀처럼 차가워지지 않아도 돌이켜보는 것에는 어떤 아름다움이 있어 몸이 따뜻해진다

 

 쉽게 녹아내려도

 

 손에 잔금이 많아 손금을 그만 믿어도 되겠는데 눈이 사람처럼 내려와 한순간 정情이 돌기도 한다

 

 사람이 갖는 외로움엔 한복판이 없어

 

 누군가 만나는 일이 어려워지고 오늘 같은 날엔 눈 쌓여가는 나무의 잔가지들이 눈에 들어온다

 

 모두 다녀간 사람처럼

 

 


 

 

이돈형 시인 / 국수

 

 

 국수를 삶는다

 

 긴 장마에 벽지가 뜨고 곰팡이 냄새는 내가 세상에 매달려 내는 냄새처럼 뭉쳐있다

 

 새들의 좁은 입으로 저녁의 외벽이 물려있고 사람들은 하루치 몸에 밴 곰팡내를 털며 돌아온다

 

 삶는 냄새엔 사려가 있어 친근하다

 

 끓어오를 때 찬물을 붓듯 허기를 끼얹고 돌아오는 사람들에게 창문을 열어 냄새를 풍겨볼까

 

 핏물 빠진 실핏줄처럼 면발이 풀어질 때까지

 

 풀어주는 게 아니라 풀어지는 게 방생이 아닐까 국수를 저으며 생각한다

 

 저을수록 한 방향이 적막해지고 갓 삶아낸 면을 헹구다 보면 손 씻는 삶을 어르는 소리가 들려

 

 안간힘과 안간힘이 불다가 한 덩이가 될 때까지 삶은 국수를 냉장고에 넣는다

 

 무례하게 불은 국수가 좋다

 

 


 

 

이돈형 시인 / 쓰다듬다

 

 

 어린 봄이 끌어안는다

 

 품은 마음의 일이라 안기면서 이래도 되는가 싶었지만 봄이 봄을 타는 것보다 내가 봄을 타는 게 낫겠다 싶어

 

 막 돋아

 어떤 그리움도 생기지 않은 봄눈처럼 걷는데

 

 인부들이 가로수의 가지치기를 하느라 사다리차를 타고 올라가 이른 봄들을 싹둑싹둑 자르고 있다

 

 없어도 그만인 가지들이 없어서는 안 될 봄을 끌어안고 떨어진다

 

 화르르

 일생의 냄새가 났다 뒷모습 없는

 

 사방이 캄캄하다거나 속수무책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없어도 그만인 내가 부러운 사람이 되어

 

 걸었다

 

 봄을 타는데 몸에 든 봄이 뛰쳐나가려 하고 봄의 나머지는 한두 발짝 뒤쳐져 따라와 왜 그러냐며 손을 잡아끌었다

 

 바람이 좀 차갑긴 해도 쓰다듬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이돈형 시인 / 몸살

 

 

 당신을 내몰았더니 몸이 아프다

 

 사람을 짚어보는 일이 이젠 손으로 하는 일이 아니란 걸 알아 작은 열이 난다

 

 제때 닦아내지 않아

 흰 몸에 번지는 검은 잉크처럼

 

 착실하게

 

 대상 없이 사랑을 배워 사랑의 이기적인 것만 배워 애초에 사랑은 죽어 내게 죽은 사랑을 짚어가며

 

 내몰았으니 물러 준다 할 수 없는

 내몰렸으니 물러 달라 할 수 없는

 

 그날이 하필 우리에겐 한날한시가 되어 당신을 짚어본다 이것이 나를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당신에게 나를 헹구듯 헹궈 널듯 널어놓은 내가 펄럭이듯 분주해지다

 

 짚어도 짚어지지 않을 때 나는 한 번 더 앓는다

 

 


 

 

이돈형 시인 / 상여

 

 

 사람이 사람을 메고 허물어져라 상여 나간다

 

 죽음이 출렁이는 하늘 아래를 머리로 이고 삶이 출렁이는 땅 위를 발로 밟아가며 상여 나간다

 

 흰 상여 나간다

 

 가벼움을 한줌 번쩍 들고 가는 사람들과 한줌의 가벼움이라도 남았을까 두 손 탁 놔버린 사람이

 

 모두 희어서 눈부신 멸망

 

 있음도 없음도 아닌 죽음을 떼메고 사람들은 왜 왔었소 왜 왔었소 내딛고 한 사람은 왜 왔었나 왜 왔었나 내딛는다

 

 요령소리에 갯바람이 불어오다 한 소식 나가신다고 두 갈래로 갈라져 그 몸을 숙이고

 

 뒤따르는 자들마저 마음이 희어서 죽음에 장단 맞춰 나간다

 

 흰 상여 나가신다

 

 


 

 

이돈형 시인 / 저녁

 

 

 지상에 남겨진 기척들을 모조리 쓸며 저녁이 온다

 

 가둘 것이 사라지고

 둘 데 없는 눈들이 조금 먼 데를 바라보게 되는

 

 어느 누구라도 삶이라는 덩어리를 어깨에 메고 짐승의 그림자처럼 터벅터벅 걸어와도 무방할 저녁이 온다

 

 다 뭉개지는데

 

 생활 속에 나를 밀쳐놓았다가도 아픈 데가 있으면 들여다보듯 오늘이 이 저녁을 들여다보고 있다

 

 둘러보면 모든 것이 뭉개진 사방인데 한낮에 벌인 사투의 현장에 조금 남아있는 붉은빛에 물려

 

 나는 입을 틀어막고

 

 한 저녁이 한 사람의 육신을 달래는 동안

 한 사람이 한 저녁의 신전을 뉘이는 동안

 

 둘러메는 일보다 더 어두컴컴한 일은 없다고 어깨를 털며 저녁을 쥔다

 

 신의 이물 없는 손을 잡은 것처럼 이 저녁이 대책 없다

 

 


 

 

이돈형 시인 / 잘디잘아서

 

 

 잘디잘은 돌멩이처럼 쉽게 구를 수 있다면 부르르 떨며 부서질 수 있다면

 

 아무렇게 뒹굴다 부딪치거나 터져도 웃는 돌멩이처럼 근근이 소멸에 가까워진 돌멩이처럼

 

닮고 싶다

 

 그런 돌멩이 옆에 팔베개를 하고 누워보면 쓸쓸함도 따뜻하다고 돌멩이에 코를 대면 가슴을 쓸어내린 냄새가 난다고

 

 누군가에 발길질하고 싶을 때 그 냄새를 맡으며 부서질 대로 부서져 잘디잘은 사람이 될 수 있겠다고

 

 잘아서 울음도 쉽게 망가지고 식은땀도 넉넉하게 흐르고 어쩌다 뜨거워져도 금세 식어버리는

 

 아주 잘디잘아서 어떤 영혼에도 쉽게 상하는

 

 가끔은 제 돌멩이에 뒤통수를 맞고도 배시시 웃는 돌멩이처럼

 

 아껴둔 쓸쓸함을 아는 돌멩이처럼

 

-시집 <잘디잘아서>(상상인, 2022)

 

 


 

 

이돈형 시인 / 의자

 

 

 헌 집 같은 의자에 앉아

 헌 집에 든 바람 같은 아버지가 담배를 태우신다

 

 어쩌다

 또 한대 태우신다

 

 공복에 태우는 담배 맛은 정든 소멸처럼 애태움을 가시게 해

 

 내뿜는 연기가 생의 뒷주머니 같은 골목에 퍼지다 종일 담벼락을 옮겨 다니며 중얼거린 의자의 그림자에 가 앉는다

 

 어쩌다 하루란 게 있어

 의자는 허虛의 혈穴을 찾아 하루치 삭고  아버지는 하루치 삶을 개어놓는다

 어둑한 골목의 기색을 덮고 있는 두 그림자 위로 석양이 쇳물처럼 쏟아진다  아무데서나 문드러지기 좋은 저녁

 

 아버지 의자에 앉아 소멸만 내뿜는다

 내뿜어도 자꾸 생을 일러바치듯 달라붙는 정든 소멸은 무얼까?

 

 아버지, 담배 맛이 그리 좋아요?

 

 


 

 

이돈형 시인 / 죽을 만큼

 

 

 사랑을 해야겠어

 태어나서 아직 죽어보지 못했으니 죽을 만큼 사랑을 해야겠어

 

 생각난다

 

 손목을 그을 때 반짝이던 유리조각이, 반짝여 손에 힘이 더 들어가는데 그때 왜 하필 죽을 만큼이 되돌아왔는지

 

 누가 그 손을 덥석 잡았다면 오랫동안 죽을 만큼 살아가겠지

 그날 이후

 집 없는 마음이 죽을까 조각만 보면 집어던졌어 집이 조각조각 부서져도 마음만 들여다보았어

 

 죽었을까

 

 나무나무나무를 말하는 내가 나무 안에 들어선 적 있나

 공기공기공기를 말하는 내가 공기 밖에 나가본 적 있나

 

 사랑을 해야겠어

 

 어디서 오는 사랑이 아니라 자꾸 어딘가로 가는 사랑 말이야

 

 훗날이 입을 막고 모로 눕는다 해도 모른 척하고 약산에 진달래꽃 필 때까지* 사랑을 해야겠어

 

 죽을 만큼이란 게 알고 보면 순식간에 시들해지거든

 

* 김소월의 진달래꽃 차용

 

 


 

 

이돈형 시인 / 어깨를 맞대고

 

 

 모임에 갔었지

 

 오늘은 모임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어 모여들고

 

 어깨를 맞대고 이처럼 다정한 어깨는 없을 거야 어깨를 맞대고

 이처럼 쉽게 조용해지는 어깨는 없을 거야 되돌아갈 어깨를 맞대고

 

 네 졸음이 내 졸음이 될 때까지 어깨를 맞대고 들어오는 사람마다

 옆으로 와 옆으로 와 얼굴을 맞대고

 

 높낮이 없는 어깨를 봐 어쩜 이렇게 인정하는 얼굴들일까

 

 알게 모르게 있으면 돼 어깨를 맞대고 누군가 한발 두발 뒤로 물러나 혼자 노는 일에 열중해도 어깨를 맞대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견해들

 

 오랜만에 모였으니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어 손을 들거나 박수를 쳐야겠지 할 말 없는 눈은 지그시 감고

 

 대책 없이

 

 착한 어깨를 맞대고

 

2022년 제3회 선경문학상 수상시

 

 


 

이돈형 시인

충남 보령 출생. 충남대학교 철학과 졸업. 2012년 《애지》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우리는 낄낄거리다가』(천녀의시작, 2017)와 『뒤돌아보는 사람은 모두 지나온 사람』(걷는사람, 2020)이 있음. 2018년 김만중문학상 수상. 애지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