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찬 시인 / 유체
비가 내리고 있었다 도처에서 젖은 풀이 생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게 너무 생생해서 실감이 나질 않았다
여중생들이 비를 맞고 신났다 이 또한 실감 나지 않았다 달리는 차들과 그것들이 튀기는 물과 깜빡이는 불빛의 긴 꼬리가 느껴지지 않았다
지하로 돌아가고 싶었다 거기에 두고 온 것이 있었다 거기엔 물이 이미 차 있었고, 알지 못하는 사이에 계절이 흘렀다
비가 계속 내렸다 비를 실감할 수 없었다 물에 비친 검은 머리카락 영혼들이 내게 손짓했다
계절감이란 말이 좋았다 계절이란 말보다
몸이 자주 부었다
-시집 <구관조 씻기기>에서
황인찬 시인 / 살아 있는 자의 마음속에 있는 육체적 불가능성*
눈이 펑펑 내리네요 장독대에는 눈이 쌓여 있고요
산수유가 붉어요 어디선가 본 듯한 그런 장면입니다
저는 이미지 속에서 메주를 쑵니다
강아지 발자국은 어지럽게 흩어져 있고 사람은 보이지 않는 세계
그런 풍경을 아름답다고 믿는 사람이 심상의 바깥에 놓여 있습니다
마당은 백색 나무도 백색
담벼락 안쪽은 모든 것이 하얗군요 개는 안 보여도 개 짖는 소리는 들리는 그런 세계에서
눈은 내리고 콩은 뜨고 이미지가 붉게 익어갑니다 메주에는 소복이 눈이 쌓이고
겨울이 가면 봄이 올 겁니다 그가 돌아오면 직접 담근 장으로 저녁을 차려줄 겁니다
맛있게 먹겠지요 장독대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도 모르는 채로
그리고 눈은 영원히 내립니다 미래는 여전히 땅속에 묻혀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이미지로 고착되어 이어지겠지요
*데미안 허스트,1991
-시집《시인시대》2020. 가을
황인찬 시인 / 점멸
새가 서서히 체온을 떨어뜨린다 자리에 앉아서 너는 일어날 준비를 한다 그전에 새가 전신주 위에서 휘청거리던 것을 너는 보았다 그전에 너는 그가 여기에 없음을 알았다 그전에 너는 잔이 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전에 실내를 휘젓는 점원이 있었다 그전에 너는 현기증을 느꼈다 그전에 같은 음악이 몇 번인가 반복되었다 그전에 커피가 식어 있었다 그전에 너에게는 하지 못한 무수한 말이 있었다 그런데 그는 어디에 있지? 그전에 새가 날아오르려다 말았고 그전에 너는 이곳을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전혀 낯설지 않다는 것이 이상했다 그전에 너는 흐릿한 꿈들이 자꾸 재생되는 것 같아 성가셨다 그전에 새가 이미 이곳에 와 있었다 그전에 새가 깨어났다가 다시 잠들었다 마치 죽은 것처럼 그전에 그것이 반복되었지만 너는 그것을 몰랐다 그전에 너는 너의 앞에 모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전에 너를 부르는 소리가 귀에 닿았다 저기요 죄송한데요 저기요 새가 이미 떨어져 있다 그전에 너는 일어나려고 했다 네가 앉아 있던 자리에 누가 이미 앉아있었으므로
-시집 <구관조 씻기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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