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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용락 시인 / 호박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16.

김용락 시인 / 호박

 

 

아침 출근길 아파트단지 담장에

호박 넝쿨이 맹렬한 기세로 앞을 향해 내닫고 있다

고양이 수염 같은 새순도 기세등등하다

처서 백로 다 지난 지 언제인데

속으로 피식 웃음이 나기도 했다

한때는 저 호박 넝쿨에 대고도

무릎 꿇고 살지 않겠다는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의 상징을 노래한 적도 있다

그러나, 그러나 오늘 아침에는

시골 토담 위에서 아침 이슬 맞으며

가늠할 수 없는 허공과 미래를 향해

자신의 내면을 밀어 올려

자식새끼 둥둥 달고 가는 어머니의 모습을 읽는다

큰 놈 작은 놈 잘생긴 놈 조금 못난 놈을

이젠 늙어버린 줄기에 올망졸망 두루 달고

도심 아파트 담장 위에서 전진하는 母性

그 뜨거운 풍요를 바라본다

 

 


 

 

김용락 시인 / 시 같지 않은 시 4

 

 

가만히 생각해보니

벌써 10년도 더 지난 일이다

<반달>의 윤석중옹이 여든의 노구를 이끌고

새싹문학상을 주시겠다고

안동 조탑리 권정생 선생 댁을 방문했다

수녀님 몇분과 함께,

두평 좁은 방 안에서 상패와 상금을 권선생께 전달하셨다

상패를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시던

권선생님 왈

"아이고 선생님요, 뭐 하려고 이 먼 데까지 오셨니껴?

우리 어른들이 어린이들을 위해 한 게 뭐있다고 이런 상을 만들어

어른들끼리 주고받니껴?

내사 이 상 안 받을라니더……"

윤석중 선생과 수녀님들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다가 서울로 되돌아갔다

다음날 이른 오전

안동시 일직면 우체국 소인이 찍힌 소포로

상패와 상금을 원래 주인에게 부쳤다

그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봉화서 농사짓는 정호경 신부님

"영감쟁이, 성질도 빌나다 상패는 돌려주더라도

상금은 우리끼리 나눠 쓰면 될 텐데……“

 

*권정생 선생은 모든 상을 거절하는데, 윤석중옹이 권선생의 의사를 묻지 않고 일방적으로 언론에 새싹문학상 수상자로 발표한 데서 이런 해프닝이 벌어졌다.

 

 


 

김용락 시인

1959년 경북 의성 출생, 계명대 영문과 및 같은 대학원 석, 박사. 1984 창작과비평사의'17인 신작시집' 「마침내 시인이여」에 '송실이 누님' 등으로 등단. 민족작가회의 이사, 감사, 대구지회장. 시집으로 <푸른 별> <기차소리를 듣고 다> <시간의 흰 길> <단촌역>이 있다. 현재 경북외국어대학교에서 대외한국어교육전공 교수 역임. 문체부 산하 한국국문화교류진흥원(KOFICE)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