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락 시인 / 호박
아침 출근길 아파트단지 담장에 호박 넝쿨이 맹렬한 기세로 앞을 향해 내닫고 있다 고양이 수염 같은 새순도 기세등등하다 처서 백로 다 지난 지 언제인데 속으로 피식 웃음이 나기도 했다 한때는 저 호박 넝쿨에 대고도 무릎 꿇고 살지 않겠다는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의 상징을 노래한 적도 있다 그러나, 그러나 오늘 아침에는 시골 토담 위에서 아침 이슬 맞으며 가늠할 수 없는 허공과 미래를 향해 자신의 내면을 밀어 올려 자식새끼 둥둥 달고 가는 어머니의 모습을 읽는다 큰 놈 작은 놈 잘생긴 놈 조금 못난 놈을 이젠 늙어버린 줄기에 올망졸망 두루 달고 도심 아파트 담장 위에서 전진하는 母性 그 뜨거운 풍요를 바라본다
김용락 시인 / 시 같지 않은 시 4
가만히 생각해보니 벌써 10년도 더 지난 일이다 <반달>의 윤석중옹이 여든의 노구를 이끌고 새싹문학상을 주시겠다고 안동 조탑리 권정생 선생 댁을 방문했다 수녀님 몇분과 함께, 두평 좁은 방 안에서 상패와 상금을 권선생께 전달하셨다 상패를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시던 권선생님 왈 "아이고 선생님요, 뭐 하려고 이 먼 데까지 오셨니껴? 우리 어른들이 어린이들을 위해 한 게 뭐있다고 이런 상을 만들어 어른들끼리 주고받니껴? 내사 이 상 안 받을라니더……" 윤석중 선생과 수녀님들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다가 서울로 되돌아갔다 다음날 이른 오전 안동시 일직면 우체국 소인이 찍힌 소포로 상패와 상금을 원래 주인에게 부쳤다 그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봉화서 농사짓는 정호경 신부님 "영감쟁이, 성질도 빌나다 상패는 돌려주더라도 상금은 우리끼리 나눠 쓰면 될 텐데……“
*권정생 선생은 모든 상을 거절하는데, 윤석중옹이 권선생의 의사를 묻지 않고 일방적으로 언론에 새싹문학상 수상자로 발표한 데서 이런 해프닝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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