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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여태천 시인 / 변심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16.

여태천 시인 / 변심

사월의 마지막 날에

치명적으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꽃이 진다는 아득한 비유에 대해

당신이 이야기할 때

나는 그만 웃어 버렸다.

당신의 바뀐 옷을 보고

당신의 놀란 눈을 보고

나는 내가 불편하다.

이제 그만 끝났으면 하는데

어디에 있는지 모르게

당신이 지나가고 있었다.

-시집 『저렇게 오렌지는 익어 가고』, 민음사, 2013

 

 


 

 

여태천 시인 / 갇힌 사람 2

 

 

라면 박스를 펼쳐놓고

그는 말이 없다

두 손은 가지런히 모은 채

그는 말이 없다

오가는 사람들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자리를 뜨지 않는다

침묵하는 자들이 세상을 지탱하고 있다는 듯

그는 말이 없다

말을 하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믿는 건지

그는 말이 없다

버스를 타려는 누군가 뛰어가고

큰소리로 누군가를 부르고

자동차 경적과 앰뷸런스 사이렌

소리에 갇혀 세상이 그를

잠깐 잊고 있는 사이

한 줌의 햇살이

그의 손 안으로 빨려 들어가

잠시 고인다

한 모금의 물

한 줌의 소금

고개를 슬며시 드는 것도 같고

무슨 말을 하는 것도 같은데

그게 말이야, 오늘이, 아니지, 그게 아니고, 안 들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자

고개를 푹 떨구고

그는 말이 없다

반 평의 세계가 어두워진다

 

- <시에> 2022, 가을호

 

 


 

여태천 시인

1971년 경남 하동 출생. 고려대 국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 2000년 『문학사상』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스윙』 『저렇게 오렌지는 익어 가고』 『국외자들』 『감히 슬프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가 있다. 2008년 김수영 문학상. 현재 동덕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