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명춘 시인 / 무명시인
그는 갔다 눈도 추운 듯 호호 손을 불며 내리는 어느 겨울, 가진 것이라곤 푸른 노트와 몇 자루의 연필밖엔 없었던 난 그가 연필을 내려놓은 것을 본 적이 없다 아니, 한 두어 번 부러진 연필을 깎을 때였을까 그가 연필을 들고 있을 때만큼은 언제나 바나나 같은 향기가 손에 와 잡히곤 하였다 그는 마을 어귀 가장 낮은 집에서 살고 있었다 마당엔 잎이 무성한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밤낮없이 그는 푸른 노트에 무언가를 적어넣었다, 그러면 나비와 새 들이 하늘에서 날아와 읽고 돌아가곤 했다 그런 그를 사람들은 시인이라 불렀다 하지만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 이름은 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인기척이라곤 낙엽 같은 노트를 찢어대는 소리일 뿐 아니, 밤보다 깊은 울음소릴 몇 번 들은 적이 있었을까 난 그의 글을 읽어본 적이 없다 하기야 나무와 새와 바람과 별 들이 그의 유일한 독자였으니 세상을 위해 쓴 게 아니라 세상을 버리기 위해 쓴 시처럼 난 그가 집 밖을 나온 것을 본 적이 없다 잠자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먹는 것도 본 적이 없다 밤낮없이 그는 푸른 노트에 무언가를 자꾸 적어넣었다 더이상 쓸 수 없을 만큼 연필심이 다 닳았을 때 담벼락에 도무지 읽을 수 없는 몇 줄의 시를 새겨넣고 그는 갔다 눈도 추운 듯 호호 손을 불며 내리는 어느 겨울 끝내 그의 마지막 시는 세상 사람들을 감동시키지 못했다 그 몇 줄의 시를 읽을 수 있는 것들만 주위를 맴돌았다 어떤 날은 바람과 구름이 한참을 읽다가 무릎을 치며 갔다 누군가는 그 글이 그가 이 세상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발표한 시라 하고 또 누군가는 그건 글도 시도 아니라고 했지만 더 이상 아무도 귀에 담지 않았다 그가 떠난 집 마당, 한 그루 나무만 서 있을 뿐 도무지 읽을 수 없는 몇 줄의 시처럼 세월이 흘러갔다, 흘러왔다 -시집 [무명시인] (2015)
함명춘 시인 / 시인과 소년
머리 위에 시를 얹고 산 사람이 있었다 그는 시인이 되고 싶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는 그곳에 둥지를 마련해 알을 낳았고 새끼를 갖게 되었다 새끼들이 떨어져 다리가 부러질까 봐 시는커녕 낙서도 아니 한 개의 글자도 쓸 수 없었다
그는 시를 내려놓기로 마음먹었다 호주머니 속에 시를 넣고 다녔고 신발 속 깔창 삼아 깔고 다녔다 자유롭게 세상에 풀어놓기도 했다 그러자 그의 머리에서 시가 쏟아져 나왔다 시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그는 떨어지고 부러지고, 때론 부서지기도 해야 비로소 시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는 이제 머리 위에 시를 얹고서도 시를 쓸 수 있었다 그의 시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그는 더 이상 시를 쓸 수 없게 되었다 머리 위에 시를 얹어도 시를 내려놓아도 그의 머릿속까지 언제부턴가 시 대신 돈과 인기가 들어차 있던 것이다 시 한 줄은커녕 단 한 줄의 글도 쓸 수 없었다
시가 그를 두고 날아가 버린 것이다 한번 날아가 버린 시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태어나 처음으로 시를 만났던 어느 골목, 작은 헌책방까지 찾아가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허사였다 그도 날아가 버린 시처럼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작은 헌책방엔 그의 손자뻘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낡은 책을 읽으며 환희심에 찬 미소를 귀까지 걸어놓고 있었다 소년은 낡은 책을 가슴에 품고 언덕을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낡은 책은 오래전 행불자 처리된 시인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첫 시집이었다 소년은 잠시 무언가를 결정이라도 한 듯 주먹을 꼭 쥐고 있었다 눈이 퍼붓기 시작했고 소년은 자꾸 넘어졌다 다시 일어나 언덕을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시집 『지하철엔 해녀가 산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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