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태천 시인 / 변심 사월의 마지막 날에 치명적으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꽃이 진다는 아득한 비유에 대해 당신이 이야기할 때 나는 그만 웃어 버렸다. 당신의 바뀐 옷을 보고 당신의 놀란 눈을 보고 나는 내가 불편하다. 이제 그만 끝났으면 하는데 어디에 있는지 모르게 당신이 지나가고 있었다. -시집 『저렇게 오렌지는 익어 가고』, 민음사, 2013
여태천 시인 / 갇힌 사람 2
라면 박스를 펼쳐놓고 그는 말이 없다 두 손은 가지런히 모은 채 그는 말이 없다 오가는 사람들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자리를 뜨지 않는다 침묵하는 자들이 세상을 지탱하고 있다는 듯 그는 말이 없다 말을 하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믿는 건지 그는 말이 없다 버스를 타려는 누군가 뛰어가고 큰소리로 누군가를 부르고 자동차 경적과 앰뷸런스 사이렌 소리에 갇혀 세상이 그를 잠깐 잊고 있는 사이 한 줌의 햇살이 그의 손 안으로 빨려 들어가 잠시 고인다 한 모금의 물 한 줌의 소금 고개를 슬며시 드는 것도 같고 무슨 말을 하는 것도 같은데 그게 말이야, 오늘이, 아니지, 그게 아니고, 안 들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자 고개를 푹 떨구고 그는 말이 없다 반 평의 세계가 어두워진다
- <시에> 2022,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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