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율 시인 / 그때 우리가 지나간 곳은 목화밭
1 눈 위에 또 눈이 쌓이고 군화 안의 양말은 이미 얼어 있었다 길가에 쌓인 눈을 치우며 눈을 크게 뜨면 너무 많은 것들이 보여서요 가끔씩 나는 네가 따뜻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머리의 열이 내려가지 않았다 눈이 이렇게 많이 온 건 처음이야 상사는 삽을 더 깊이 찔러넣으라고 했다 눈이 쌓이고 또 쌓여 앞이 보이지 않았다 세상엔 맞지 않은 일기예보가 너무 많아요 방한복 위에 떨어진 콧물은 이미 얼어 있었고 아무도 여기가 천국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2 겨울이 지나고 있었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던 날 너는 눈 속으로 뛰어들었다 나는 너의 뒷모습을 보며 이 계절 동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빈방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마스크를 끼고 다 같이 웃고 있을 때 상사가 한 명씩 호명했다 조금은 시끄럽고 조금은 슬프게 눈 속에 있던 발자국 위에 또 눈이 쌓였다 얼은 손을 잡고 발을 동동 굴렀다 너는 호주머니 속에서 미지근한 핫팩을 꺼내 주었다 그날 배낭 속의 물은 모두 얼어 있었고 너의 눈썹 위에도 흰 눈이 쌓여 있었다 회화나무 밑으로 흰 그림자가 지나갔다 춥고 적막한 하루였다 누군가에게 받은 위문 편지에는 늦어서 미안하다고 이제 곧 봄이 올 거라고 했다 그날 밤은 아무도 울지 않았다
3 쌓인 눈밭을 걸었다 깃발을 들고 푹푹 쌓인 눈을 밟으며 앞으로 앞으로 걸었다
지난 여름 남쪽 바닷가의 게스트하우스에는 미성년자들이 많았고 너는 얇은 손목으로 저기요, 라고 더 나은 사람처럼 말했다
발이 눈 속으로 푹푹 빠졌다 온몸이 땀으로 젖고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얼었다 녹았다
모르는 길을 걸어서 모르는 장소를 지났다
기나긴 행렬 끝에서 우리는 왜 걷고 있는지 아무도 묻지 않았다 아무도 한쪽 다리를 잃은 병사와 우리의 구호에 대해 묻지 않았다 그날 누군가가 흰 깃발을 높이 들었고
묶은 신발 끈이 자꾸 풀렸다 행렬은 끝나지 않았다 손에 든 총은 너무 무거웠고 물집이 생긴 쪽의 발이 더 얼어 있었다
쌓인 눈길을 걷고 또 걸었다 해가 지자 마을 바깥에서는 자주 폭죽 소리가 들렸고 그 계절 내내 한파가 끝나지 않았다 월간 『현대시』 2021년 3월호 발표
김지율 시인 / 그렇지만 사과꽃은 피지 않았다고 한다
1. 이 숲을 지나가는 무심한 시간들을 사과라고 치자
2. 사과는 빗속에서 커지는 나 사과는 푸른색 사과는 빨간색 조용하게 부풀어 오른다 둥근 사과는 쪼그라들었다가 갑자기 터지는 십 분 전의 로망
3. 트럭이 사과를 가득 싣고 간다 저 모퉁이를 돌아갈 때까지 나무에서 오래 흔들리는 사과는 언제나 나 사과의 바깥은 사과의 여백으로 가득하고
4. 사과를 한입 베어 물면
5. 반복되는 사과의 구조와 반복되는 사과의 인내심 앞에서 사과는 사과의 부재를 증명하고
6. 모든 꽃은 하나의 얼룩에서 시작되고 똑같은 무로 현현하므로
7. 사과의 시간은 견고하고 사과의 공간은 넓다 반 토막 난 무릎으로도 울지 않는 것들이 곁에 있었다 작은 사과들 속에 더 작은 사과가 굴러올 때까지
8. 어느 날 사과를 꺼내 다시 본다고 치자 숫사마귀가 자신의 머리와 목숨을 암사마귀에게 내맡긴 것처럼 자살과 종교와 반항은 다르지 않아서 물속에서 퍼져 나가는 푸른 잉크를 보며 사과의 윤리와 사과의 맹목에 대해 침묵하기로 했다
9. 햇빛과 돌과 어둠을 등져야만 떠날 수 있는 빈방과 월간 『현대시』 2022년 5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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