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애 시인 / 하현
깊은 호수 속으로 빠진 달 바닥에 흡반처럼 붙은 달이 서늘하다 돌을 던지자 화들짝 놀란 물이랑 겹겹이 달 쪽으로 쓸리며 달이 야윈다
유빙처럼 떠돌던 별들이 난간 위에 한 호흡 내려놓는다 서쪽에 잠들지 못한 비명이 있다고 누군가 말한다
나는 돌아오지 못한 비명처럼 지금도 명치끝이 아프다
할머니는 바늘로 손톱 밑을 따주셨다 검은 피는 죽은피라 하셨다 그때마다 미간이 깊은 주름을 잡았고 자목련은 자주 몸을 버렸다 아버지는 멀쩡한 날씨를 탓하셨다
날개 없는 것들은 몸에 벼랑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차디찬 가슴을 앓은 후에 사람들은 하얀 울음주머니를 창가에 매달며 늙어 갈 것이므로 눈물은 늙지도 않을 것이다
바람은 잠시 어두운 풍경을 거두고 달 속으로 잠을 밀어 넣는다
<시사사> 2012년 5-6월호
이영애 시인 / 남편의 몸속에 라디오가 있다
한 옥타브 오르내릴 때마다 허공이 출렁인다 드르렁 드르렁 중얼 중얼 목젖이 훤히 보이는 길목 호흡이 가팔라지다가 숨이 탁 멎는 순간, 고요 왁자한 세상소리 말문이 막힌 닿소리 꾹꾹 눌러놓았던 말들 밖으로 나오려고 몸부림친다 놀라 일어나 소리의 키를 늘리려고 웅크리고 있던 라디오 툭툭 친다 막대 채널이 흔들리고 고여 있던 말들 줄줄이 쏟아진다 내려앉은 어깨를 하얗게 세우고 푸흐푸흐 들려오는 후렴구 리듬의 한 켠이 기울고 있다 나는 안테나를 쫑긋 세우고 그의 지친 소리를 듣고 있다 몇 어절은 자음이 빠지고 몇 구절은 모음이 없는 소리 헛바퀴만 돌고 도는 고정 채널 바람 부는 날은 파열음으로 때론 무리무리 풀죽은 소리로 늘었다 줄었다 예민해진 신경줄 나는 좌우로 굽어있던 주파수를 맞춰놓고 골똘해진 그의 생을 새기느라 온몸이 뻐근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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