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춘근 시인 / 정연리 - 동짓달 초하루의 비극
1. 산그늘 방공호에서 깜빡깜빡 졸고 있는데 민가에서 인민군, 중공군들 점심 먹는 시간에 맞춰 미군 쌕쌕이가 날아 왔다
원산으로 폭격 가는 것이라 생각하고 방공호 입구를 가린 나뭇가지 틈으로 보니 그날은 조종사 얼굴이 보일 정도로 낮게 마을을 맴돌고 있었다
갑자기 하늘이 두 쪽 나는 듯한 천지개벽 소리가 들리고
쿵! 쿵! 쿵! 쿵!
1톤짜리 폭탄 네 개가 이백 집도 안 되는 마을에 떨어졌다
2. 순간, 얼굴이 화끈 거릴 정도로 지옥의 화염이 한 바탕 몰아치고 부서진 집에서 나는 묵은 먼지 살이 타는 매캐한 연기가 목구멍을 찔렀다
또 일식 같은 어둠 속에서 들리던 살려달라는 사람들 비명소리 그들을 구하려 나가려는 순간 중공군이 방공호 앞을 막고 다시 미군 쌕쌕이가 온다고 총을 겨누고 있었다
우리는 숨을 죽이고 불에 타서 죽어가는 인간의 마지막 절규가 승냥이 소리처럼 점점 가늘어지는 것을 멍하니 그대로 듣고 있었다
그 때 선명하게 들리던 어린 인민군 병사의 잊지 못할 신음 옷에 불이 붙었는데 움직일 수가 없어요 어~머~니
3. 해가 떨어지자 주검들이 공회당 앞으로 들것에 담겨서 왔다
지붕 다락에 숨어 있던 사람은 전부 불에 끄슬려 죽었고 마당에 방공호를 파고 있던 사람도 절반은 폭격에 맞아서 사망을 했다
공회당 앞에는 형체를 알아 볼 수 없는 인민군, 중공군들 시체가 백여 구 동네 아저씨, 아줌마 그리고 친구들 시신이 육십 구
마냥, 그대로 둘 수 없어 꽁꽁 얼은 땅은 팔 수 없어 밭고랑에 일렬종대로 눕혀 놓고 눈으로 대충 덮었다
4. 진달래 피는 봄이 되자 시체 관절이 오그라들면서 눈 속에 있던 주검들이 불쑥 튀어 나왔다
앉아 있는 시체 반쯤 꺾어진 시체 엎드려뻗쳐 있는 시체 어디론가 기어가는 시체
달밤이면 그들이 악귀처럼 달려들 것 같아 밤 외출을 할 수 없었다
5. 날이 풀리면서 시체들 피 냄새를 맡은 개들이 뜯어 먹고, 파먹고 나중에는 사람 손목을 물고 다녔다
독이 오른 인민군들이 총으로 꺼꾸러트려 마을 공터에 단단히 묻었지만 사람들이 그 개들을 파내서 묵은 허기를 채우던 밤
지금 문혜리 훈련장 근처에서는 미군 대포들이 모여서 정연리로 좌표를 맞춰 놓고 사격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춘근 시인 / 임시 중학교 -정연리
한국전쟁 한 달도 안 돼서 학교는 다 폭격 맞아 건물은 너덜너덜해졌고 운동장 가운데 불발탄이 거꾸로 박혀 있었다
그래도 임시 학교가 만들어져 인민소학교는 마을 곳곳에 있었고 중학교는 학 저수지 근처 창고를 사용하고 있었다
당시 정연리에 살던 임희순 씨는 책 보따리와 도시락을 둘레 메고 먼지 풀풀 나는 신작로를 가다가 비행기 소리가 들리면 장끼 새끼 마냥 풀숲에 머리를 쳐 박고 있었야 했다
책상 걸상도 없이 가마니를 깔아 놓은 바닥에서 수업을 하다가도 공습 사이렌이 울리면 근처 산 방공호로 뛰어야 했다
이런 일이 반복 되자 당장 폭격 맞아 죽을 것 같아 임시 중학교에 가던 친구들 끼리 산그늘에 누워서 낮잠을 자다가 도시락을 먹고 집으로 돌아 온 날
중학교 간판도 없었던 학교 저수지 창고와 학생들이 비행기 폭격에 날아갔다는 이야기가 들렸고 겨우 살아남은 교사들이 인민군에 끌려 간 사실도 나중에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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