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병록 시인 / 침대와 화분
여기 살아 있는 건 둘뿐이다
무수한 고통이 찾아와 쓰러지는 침대와 한밤중에도 눕지 않는 화분
일어서지 못하는 침대가 화분에 침을 뱉는다 화분은 치욕에 담긴 몇모금의 연명을 향해 뿌리를 뻗는다
화분은 꽃을 보여준다 사라지는 시간을 움켜쥐려는 손가락처럼, 그러나 고통스러운 순간의 두 눈을 가리려는 손바닥처럼 붉게 피어나는 치욕을
침대는 주먹을 보여준다 다가오는 마지막을 내리치려는 둔기처럼, 그러나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으려는 강경함처럼 단단해지는 적의를
이 기묘한 동거를 연애라 불러도 좋을까
시간을 일으켜 세울 수 없는 침대의 완력과 살아서는 여기서 한발짝도 걸어나갈 수 없는 화분의 직립
고개를 돌리려다 자꾸 눈이 마주치는 적의와 치욕은 닮았다 우연에 불과한 데깔꼬마니처럼
-시집 『목숨이 두근거릴 때마다』
유병록 시인 / 개를 기르는 사람
그는 개를 길렀다 젊은 날, 주체할 수 없는 마음을 집어삼킬 개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 했다 그렇게 개가 태어났다
가슴을 쥐어뜯듯이 마음을 꺼내어 손바닥에 올려놓으면 개가 달려와서 긴 혀로 핥아 먹었다
개는 무럭무럭 자랐고 그는 인내심이 강하고 겸손하며 신사적인 사람으로 존경받았다
개는 그에게만 보였다 아무도 그의 곁에 있는 덩치 큰 개를 보지 못했다
큰 개와 함께 산책하는 사람의 모습이 그러하듯 그가 개를 데리고 다니는지 개가 그를 끌고 다니는지 알 수 없었으나
개와 함께 그는 평온하게 살다 평온하게 죽었다
오랫동안 기르던 큰 개도 함께 죽었다는 사실을 남은 사람들이 알 수는 없었다
-시집 『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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