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진희 시인 / 완성의 시간
매미가 울음 우는 사흘은 땅 밑 캄캄한 십 년을 완성하는 시간이다 제 몸 찢어 낸 푸르름 모두 버리고서야 나무는 한 해를 완성한다 신생을 위하여 몸을 틔운 그 자리까지 길고 고단한 살의 물길을 거슬러 연어는 오른다
울음은 땅 밑까지 내려가서 빛나는 어둠을 곰삭혀 한여름 열고 무성한 잎들 모구 거두어들여 적시고도 남을 새 그늘을 마당 가득 펼쳐 놓는다
필생의 물살 거슬러 오르며 그 많은 울음 하나하나 떨궈 내 마침내 생의 첫 자리로 돌아가는
그들이 안간힘으로 펼쳐 보이는 몸은 소리와 크기가 다를 뿐 완성을 향한 투신이 어찌해야 하는가를 그들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는 것이다
권진희 시인 / 어떤 그리움은 만 년을 넘기지
나 죽거든 제주도 사계 바다에 뿌려 줬으면 해. 유분遺粉이라고 티 내지 말고 지퍼락 같은 데다 조금만 담아 가서 슬쩍 공항 검색대를 통과해 보렴. 아 3일장葬이니 뭐니는 신경 쓰지 말고 나중에라도 시간 날 때 시간 되는 형제끼리만 걷기 좋은 조거팬츠에 챙 넓은 모자를 쓰고 그래 선글라스도 꼭 챙겨야지.
사계 해안도로를 걷다 보면 멀리 형제섬이 보이고 사람 발자국 화석이 있는 곳이 있을 거야. 거기 근처 아무 데서나 마지막으로 나를 보내 줘.
1만 년도 더 되었다는 발자국 작은 이들을 만나면 물어볼 거야. 어떤 그리움이었길래 만 년을 훌쩍 넘겨 지금도 가고 있냐고. 만 년이 가도 변치 않을 눈길로 너희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형제섬 쪽으로 흘러갈래. 이렇게 나란히 서 있기로 한 것 아니었냐고, 끝까지 같이 서 있지도 못할 거면서 한 배(腹)에는 왜 태어났느냐고 일찍도 등 돌려 버린 이의 등짝 철썩철썩 후려치면서
길 끝에는 종鐘을 엎어 놓은 것처럼 생긴 산방산 서 있지. 툭 치면 그 속 오래오래 울릴 것 같은. 살다 힘들 때면 저물 무렵 산방산 별빛 아래 앉아 가만히 귀 기울여 보렴. 그러면 어디선가 네 이름 오래오래 부르고 있는 긴 맥놀이소리 들릴 거야.
오래전 키 작은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형제섬이 지금도 그런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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