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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성룡 시인 / 산언덕에 올라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3. 2. 24.

박성룡 시인 / 산언덕에 올라

 

 

늦가을 아침

산언덕에 올라 발밑을 내려다본다

흐려진 안경알을 닦고 세상을 내다보듯이

발밑 풍경들은 그렇게 선명하다

 

짙은 빛깔의 향연 속에서

인간의 역사가 흘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우리는 서로 사소한 일로도

헐뜯고 살아가게 마련이지만

한발짝 이렇게 높은 데 서서 바라보면

모두가 부질없는 짓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먼 곳에 펼쳐진 황토밭마저가

아름다운 꽃밭으로만 보였던 내 젊은 날의 이야기들

 

가난한 농민들만이 착하게 모여 살던

우리 고향 내 생가가 문득 생각난다

발 아래까지 바닷물은 밀려들어 철석이고

물새 울음들은 아침저녁으로 내 귓전을 멍멍하게 했던 그곳 바닷가 마을

 

대나무숲 속의 붉은 동백꽃

지금 이 순간 내 앞의 도시 풍경들은

어쩌면 그때의 고향 마을처럼도 보인다

 

인생은 어쩌면 착각의 연속일는지도 모른다

오늘 이 순간처럼

조금만 높은 산언덕에 올라서 보아도

세상은 조금은 달리 보이게 마련이다.

 

 


 

 

박성룡 시인 / 어느 삼거리에서

 

 

고단한 출근길

아침마다 대문을 나서노라면

어린 딸아이와 아들 녀석이

앞을 다퉈 따라나서며 동행을 강요한다

어떤 날은 묵직한 딸아이의 책가방을 들어다 주기도 하고

어떤 날 아침에는 또

아들 녀석의 신주머니를 들어다 주기도 하지만

어떻든 우리들은 오래지 않아 서로 헤어져야 할

삼거리에 이르고 만다

 

그런데 웬일일까,아침마다 그들에게 동전 몇닢씩을

쥐여주고 난 다음의 나의 가슴은 왜 그리 허전한지

왜 그리 자꾸 서글퍼 만지는지

오래지 않아 저녁이면 다시 서로 합류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나는 이 조그만 헤어짐이 못내

섭섭해만 지는 것이다

 

언젠가는 꼭 한번 우리 앞에

아주 헤어져야 할 삼거리가 놓이고야 말 것이기에

나는 아침마다 미리미리 조금씩 울어둬야 하는 것일까

그날은 기어이 터지고야 말 홍수같은 그 울음을 달래기 위해

나는 미리미리 조금씩 울어두는 것일까

그러나 어린 것들의 얼굴과 가슴 속에는

언제나 훤한 아침 햇살만 가득하다.

 

 


 

박성룡 시인

1932년 전남 해남 출생. 중앙대 영문과 수학. 1956년 「문학예술」에 「화병정경」 등이 추천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함. 1969년 첫시집 「가을에 잃어버린 것들」 간행 후, 「춘하추동」 「동백꽃」 「휘파람새」 「꽃상여」 「고향은 땅끝」 등의 시집을 간행함. 중학교 교과서 詩 <풀잎>수록. 전남도 문화상(57년), 현대문학상(64년), 시문학상(82년), 호남문학상(86년), 제펜클럽한국본부문학상(1989)등 수상. 「사상계」, 「민국일보」, 「한국일보」, 「서울신문」등 언론계 종사, 현 정년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