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태현 시인 / 뒷짐
마땅히 져야할 것이 없는데도 느린 걸음에는 두 손이 저절로 허리에 얹힌다
져야 할 무엇이 있다는 것일까 무엇을 져야 할 나이가 됐다는 것일까
뒷짐 지는 걸 아내가 한사코 말리는 까닭은 늙은 냄새나는 남편이 싫다는 거겠지만 사람이 신록처럼 들이치고 어둠이 꽃처럼 피는 길을 걷다보면 나도 모르게 뒷짐을 지는 것이다
활갯짓에 밀려나 뒷덜미에 매달려 있던 늙음이 등허리에 쏟아져 내려 느린 걸음과 걸음 사이 나도 모르게 받아 업는 시늉을 해보는 것이다
하짓날, 뒷짐을 진 앞산 능선이 무엇을 업어도 슬픈 얼굴인 지게처럼 느린 저녁을 건너오고 있다
시집 『이달의 신간』 2015. 시인동네 시인선
안태현 시인 / 늦은 인사
천변에 노랑꽃이 피었다
박수가 없는 11월에 꽃은 왜 정장을 입고 나오나
몇 번인가 침수의 흔적이 있는 너는 조금 힘겨워 보인다 흐린 물살이 안감에서 노랑을 조금씩 닦아내고 있는 것 같다
간신히 얻은 노랑 한 줌을 쥐고 있으면 꽃의 말을 배우고 싶어진다
이제는 낙서에서 찾아볼 수 없는 다정한 말들을 하나씩 불러보고 싶은
꽃과 나의 근친의 세계
나 때문에 아팠을 사람이 있을 거라고 꽃 한 송이 얹어 말해주는 이가 있을 것 같은데 손바닥을 펴면 흩어진 노랑을 따라 아이도 가고 노인도 간다
아무도 가본 적 없는 캄캄한 내일 저녁엔 누가 생의 한복판에서 늦은 인사를 던질 것인가
시집 『저녁 무렵에 모자 달래기』 2017. 시로여는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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