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종빈 시인 / 네비게이션
자동차를 몰고 나서면 어느새 아내가 네비게이션 안에서 말하기 시작한다. 또박또박 하느님처럼 말한다. 전방에 과속방지턱이 있습니다. 안전운전 하십시오. 그녀가 시키는 대로 브레이크를 밟는다. 보이지 않는 아내가 다시 말한다. 전방에 과속단속구간입니다. 과속에 주의하십시오. 나는 언제나 길들여진 의식으로 브레이크를 밟는다. 어디로 갈까 묻지 말고 그림자처럼 오롯이 따라만 오세요. 당신이 한평생 건너온 그 질퍽하고 굴곡진 삶도 거역할 수 없는 내 힘에 이끌려 왔듯이.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현관문을 열면 그녀가 다시 말하기 시작한다. 너무 늦게 들어오지 마세요. 내가 심심합니다. 제발 담배 피우지 마세요. 내 건강에 해롭습니다. 당신은 영원한 내 포로입니다.
- 시집 <가시> (화니콤, 2011)
홍종빈 시인 / 선홍빛 아우성
상큼한 가을이 색색으로 넘나드는 문경새재 들머리 문경사과축제 행사장에서 선홍빛 잘 익은 꿀사과 한 상자 사왔다
상자 속에서 종소리가 난다
켜켜이 익은 저 종소리는 누군가 숨 가쁘게 망루에 뛰어올라 세상을 들깨우는 호적소리처럼 상큼하게 붉어진 소리다
한 줄기 비바람을 풀무로 지어 햇빛을 녹이고 달빛을 녹이고 새벽 단잠을 녹여 노오란 속살로 채워지기까지 이를 악물고 완숙시킨 농부의 심장 소리다
행간 행간을 꽉 채운 저 단물이 상큼하도록 아삭거리는 꿀사과로 인정받기까지 오금 저린 무늬로 토해내는 선홍빛 아우성이다
-시집<젓가락에 피는 꽃>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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