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상 시인 / 부활절
씨랑 뿌리랑 벌레랑 개구리들이 땅밑에서 새 모습을 하고 일제히 얼굴을 내미는 부활의 계절.
나도 우렁찬 천상의 나팔소리 함께 면(冬眠) 같은 무덤 속에서 깨어 일어날 그날을 그리며 흥겨움에 잠긴다.
원죄(原罪)와 본죄(本罪)의 허울을 벗은 내가 에덴 본디의 모습을 하고 성부께 영락(永樂)을 선포받을 그날을 그리며 흥겨움에 잠긴다.
색색(色色)의 꽃들인 양 대원(大願)을 이룬 가족과 이웃들을 만나서 흘러간 이승의 사연을 주고받을 그날을 그리며 흥그러움에 잠긴다.
인공과 자연이 새살로 아문 지구의 완성을 둘러보며 영광과 평화의 훈풍 속에 노닐 그날을 그리며 흥그러움에 잠긴다.
섭리와 자유의 경계(境界)가 스러진 온누리의 성좌(星座)를 훨훨 날으며 천사랑 어울려 찬미에 취할 그날을 그리며 흥그러움에 잠긴다.
구상 시인 / 은총에 눈을 뜨니...
1. 이제사 비로소 두 이레 강아지만큼 은총에 눈을 뜨니 이제까지 시들하던 만물상이 저마다 신령한 빛을 뿜고 그렇듯 안타까움과 슬픔이던 나는 죽고 그 덧없음이모두가 영원의 한 모습일 뿐이다
이제야 하늘이 새와 꽃만을 먹이고 입히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공으로 기르고 살리심을 눈물로써 감사하노라 아침이면 해가 동쪽에서 뜨고 저녁이면 해가 서쪽으로 지고 때를 넘기면 배가 고프기는 매한가지 지만
출구가 없던 나의 의식 안에 무한한 시공이 열리며 모든 것이 새롭고 모든 것이 소중 스럽고 모든 것이 아름답다
2. 이제는 신비의 샘인 목숨의 시간들을 헛된 욕망으로 흐리고 더럽혀서 연탄빛 폐수로 흘려 보내진 않으련다. 나의 삶을 감싸고 있는 신령한 은총에 눈떴으매 현재로부터 영원을 살며 진선미의 실재를 스스로 증거하여 보이리라.
지난 날 나는 똑똑히 보아왔노라. 눈에 보이는 사물만을 받들어 섬기고 눈에 보이지 않는 도리는 외면하던 모든 소유의 무상한 파탄을! 그리고 나는 또한 보아왔노라.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굳게 안고서 영원의 깊은 요구에 응답하는 마음 가난한 이들의 불멸의 모습을!
이제 나에게는 나의 무능과 무력도 감사하고 앞으로 살기에 필요로 하는 것은 오직 마음의 순결, 그 하나 뿐이로다
- 구상<두 이레 강아지만큼이라도 마음의 눈을 뜨게 하소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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